누가 그 꽃을 꺾었나
17 하늘에게
: 시나요리 아리사
*
타닥타닥하게 타오르던 불꽃은 새벽이 다 저물고 아침 해가 뜰 때까지도 이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배톤 터치를 하듯 해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완전히 사그라졌다던가. 부스가 모두 정리되고 한가운데 세워진 캠프파이어의 불꽃은 얼마 전의 수학여행을 떠올리게 했다. 여러 감회를 안고 불꽃이 까만 밤을 향해 피어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버티려 했지만 결국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축제의 꼬리를 밟으며 기숙사 방으로 향했다. 침대에 축 늘어진 몸을 뉘고 얻어온 것들을 하나하나 쓸며 만지다가 자연스럽게 그려진 미소와 함께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추억이 선명하게 반짝이는 불빛으로 그려졌다. 눈꺼풀 아래로 불꽃놀이가, 캠프파이어의 불길이, 그리고 낮의 태양 아래 시끌벅적하던 부스들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즐거운 축제를 즐거운 것으로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축제가 시작되기 하루 전 날, 전해진 편지 덕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아리사 군이 보고 싶지 않아요.
그 말만 남긴 채 방으로 달려갔다. 그 뒤로 며칠, 같은 반인 이상 필연적으로 얼굴을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마다 그의 눈을 피했다. 친구들과 떠들면서 저도 모르게 웃으려다가 그를 보고 어색하게 굳기도 했다. 사실은 그에게 화를 낼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앓았다.
마음에 풍랑이 가라앉질 않았다. 태풍을 맞은 것처럼 한 번 파도가 크게 칠 때면 절벽이 깎여나가듯 생채기가 늘었다. 마음의 통증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몸을 혹사하였다. 하루 온 종일을 물속에서 보내고 일부러 제 소리를 먹었다. 감기와 패널티를 핑계로 입을 다물고 그저 웃는 얼굴만 그렸다.
작은 반항을 이어나갈 때마다 사무치는 건 무력함이었다. 주변을 걱정시킬 뿐인 투정, 못난 스스로의 모습에 더 어쩔 줄 모르고 발만 굴렸다. 빈 향수병을 허망하게 만지작거리다 선생님의 손에 매달리고, 그러나 앨리스를 사용해도 슬픔보다 더 짙게 깔리는 자기혐오나 무력감은 여전히 발치에 채여 자꾸만 바닥으로, 바닥으로 발목을 잡아끌었다.
그를 만나러 가고 싶었다. 만나서 사과를 하고 괜찮다고 웃고 싶었다. 이런 일로 그와의 사이가 소원해지길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묻어버리고 꾸며낼 힘조차 없어 수영장에 잠겨 있길 한참, 모든 일에 한없이 무기력해질 즈음에── 그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에게,]
곱게 접힌 편지 봉투, 겉면에 쓰인 이름은 心弱理 有佐. 글자의 표면을 더듬다가 조심스럽게 편지 봉투를 연다. 열기까지 무수히 많은 망설임이 있었다. 무슨 말이 적혀 있을까 두려웠다. 마주보기까지도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다. 펼친 편지지 안은 평소 그의 성격답지 않게 어쩐지 두서없고, 두서없는 만큼 많은 썼다 지운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종이에 새겨진 눌린 자국을 더듬으며 얼마나 많은 말들이 이 안에 담겼다 지워졌을까. 흔적을 짚어 보았다.
겨우 힘겹게 적힌 용건은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편지로 다 전하지 않는 것이 그답다 여겼다. 그라면 글보다 목소리로 들려주러 할 것 같았다.
만나러 가도 괜찮을까. 주저하고 망설이고 그러다 무거운 발길을 이끌고 향하였다.
“왔어요?”
호숫가 옆 벤치, 이슬을 맞으며 기다린 걸까. 일어서 마주하는 그의 까만 머리카락에 어렴풋하게 맺힌 물방울에 시선을 주다가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세이라가 한 말에 대한 답을 먼저 하고 싶어요.”
평소보다도 조금 밝은 듯 힘이 들어간 목소리. 그래서 더욱 여실하게 긴장이 느껴지던 목소리. 그의 말에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을 마주하기 힘들어 그저 발끝만을 보았다.
답. 어째서 제게 이런 말을 한 거예요. 그 물음에 대한. 세이라 역시 거듭 생각하던 것이지. 어째서 그는 제게 이런 사실을 알려주고 만 것일까. 그리고 나오는 답은 언제나 하나였다. 그녀를 걱정해서.
바다 앞에서 들떠버린 그녀를 내내 어떤 마음으로 지켜보았을까. 다음에 또 와요. 아무 의심 없이 건넨 말에 혼자 무슨 고민을 했을까. 그러다 어떤 결심을 하고 말을 꺼낸 걸까. 누군가는 그녀에게 전해주어야 했을지도 모르는, 하지만 그가 말할 필요는 없었던 것.
그는 무슨 결심을 하고 그녀에게 잔혹한 현실을 일깨워준 걸까. 그녀 인생의 무엇을 책임질 셈으로. 아──, 역시 그와 마주하는 것은 힘들다고 느꼈다. 향해오는 눈동자에 시선을 피하고 도망가고 싶었다. 그에게 답을 구할 게 아니었다. 그에게 책임을 요구할 게 아니었다. 스스로의 못난 부분이 그 앞에서 낱낱해지는 것만 같았다.
“용서해주길 바라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그녀에게 용서를 구할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
서글픈 기분이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이렇게 서글프고, 또 속상한지 알 수 없었다.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며 벌이라도 받는 기분으로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러다 차츰 이해했다. 누구에게도 화낼 수 없어서 서글프고 속상한 것이구나. 받아들일 수 없어도 받아들여야만 하는 무거운 굴레에, 개인의 노력으로는 어쩌지도 못하는 부조리한 시스템에 무력하여 슬픈 것이구나.
그러니 더욱 당신에게 화를 낼 일이 아니었는데.
주먹을 꾹 쥐었다. 그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말해야지. 괜찮다고. 아리사 군이 책임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그러나 말은 채 나오기 전에 펑, 작은 소리와 함께 터졌다.
“그러니까, 나는 제재를 뒤집을 수 있는 사람이 될 거예요.”
차가운 수면 위로 한 방울, 두 방울, 소리가 떨어져 고인다. 그의 말은 늘 따스하게 떨어져 그녀의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그러면서 존재를 파문으로 남겼다. 어딘지 완고한 부분까지 포함해서 그다웠다.
항상 놀라게 만드는 점까지.
의지가 담긴 말이었다. 강하고 확고한. 그저 치기어리거나 충동적인 발언이 아니라 충분히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도달한 결론이라는 것이 목소리에서부터 전해졌다. 이끌리듯 시선을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하늘을 담은 눈동자. 파랗고 높고, 때로는 다정한 포용력을, 때론 경쾌한 들뜸을, 시야를 멀리까지 하게 만드는 그라는 존재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고운 빛의 눈동자. 그 눈과 시선을 맞추고는 떨어트리지 못했다.
“그렇게 되어서, 세이라에게 바다를 돌려줄게요.”
행복을 돌려줄게요. 그렇게 들린 것 같았다.
“그러니까, 지금이 아니더라도, 내가 다음에 목표를 이루면, 그 땐 다시 나랑 바다에 가 줄래요?”
이 순간을 위해 억눌러왔단 듯 그의 눈이 휘어진다. 파란 눈동자가 눈꼬리를 따라 잠깐 숨었다 이어 빛을 내비쳤다. 깜빡이며 향해오는 미소에 일순 바다 향기를 맡은 기분이 들었다.
착각이겠지. 이곳에서 바다는 아주 먼 곳에 있어서 바람결에 묻어나기에도 너무나 멀고머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나마 깨진 유리병의 흔적이라도 되듯 쏴아아──, 가슴을 벅차게 만드는 바닷바람이 그에게서부터 불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목소리가 전해준 것만 같았다.. 언제나 선명하게 자신을 향해 두드려오는 영롱한 빛. 너무 잘 닿아서 무서워요. 그렇게 말하던 소년이 이제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그 두려움을 읽어내며 손을 내밀었다. 소라게처럼 자꾸만 안으로, 안으로 숨어들어 그 작은 공간 안에서 만족을 배우려는 그녀의 마음을 끊임없이 두드리고 바깥으로 꺼내려 한다.
이번에도 그녀는 결국 이기지 못했다. 처음부터 예정된 결과였던지도 모른다. 아주 오래 전, 동화에서부터 났던 결말인걸.
“약속, 해줄 수 있나요?”
바다를 돌려주겠다고, 그리고 또 한 번 같이 바다에 가주겠다고. 그리고, 그리고 또……. 눈물이 눈앞을 가린다. 허둥대며 손으로 눈가를 부비다 결국 포기하고 웃어버렸다. 아리사 군 앞에서는 매번 울보가 되어버리는 것 같아요. 뿌옇게 변한 시야를 깜빡여 닦아낸다. 고개를 저어 눈물을 털어내고 세이라는 힘껏 웃으며 그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보였다.
*
책상 위에는 두 송이 장미가 나란히 있었다. 한 송이는 초등부 시절 받은 푸른 장미, 한 송이는 바로 며칠 전 축제의 끝에 받은 흰 장미. 엇갈려 놓인 장미가 그를 담아놓은 것 같았다. 희고 푸른 하늘을 닮은 친구.
고심해서 고른 편지지를 꺼냈다. 고양이가 걸어가는 귀여운 무늬의. 잘 펴진 편지지 위에 미리 적어둔 문장들을 옮겨 적었다. 가벼운 안부, 날씨, 일상, 바로 어제 새벽까지도 마주했던 상대에게 의례적인 인사를 하는 것 같아 어색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한 번 더 건네는 안부 인사가 즐거웠다.
[……그래서, 이건 별 것 아니지만 선물이에요.]
축제에서 기술반에게 구매한 네모난 오르골이었다. 반질반질하게 표면을 다듬은 사각의, 여기 음악이랑 함께 담고 싶은 감정과 마음을 담을 수 있다고 하였다. 츠바사의 설명을 떠올리며 세이라는 오르골에 멜로디를 담았다.
[멜로디를 담을 때 실은 저도 함께 노래를 불렀답니다.
앨리스를 사용해서 불렀으니 들리지는 않겠지만 왠지 아리사 군에게라면 닿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함께 들어주면 기쁠 거예요.]
-행복해지길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바로 얼마 전에도 이와 비슷한 말을 들었다. 여러 번 정곡을 찔리고 말았다.
미리부터 포기하는 것으로 지키려던 마음이 있었다. 이 이상 슬퍼지지 않도록, 이 이상 절망하지 않도록, 이 이상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기원에 허무해지지 않도록 차라리 욕심내지 말자. 그렇게 해서 지키고 싶었던 한 줌의 평온이 있었다.
그러나 얻어낸 평온은 안주에 불과하여 도저히 행복이라 이름붙일 만한 것은 아니었다.
「나아가지 못하고 괜찮아지지 못하는 자신을 속상해하고 있잖아요.」
그의 말대로였다.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게 되면 더욱 그 두려움을 피하고 싶어질 것이라 했지. 그 말이 맞다. 세이라는 사실 알고 있었다. 두려워하던 건 그저 사랑하는 가족이 죽는 것만이 아니었다.
유일한 가족을 잃음으로서 마침내 홀로 남고 마는 것. 혼자가 되고 마는 것. 가장 마주할 수 없었던 깊은 곳의 두려움. 누구에게도 말을 꺼낼 수 없던 것.
「학원을 졸업하고 나면 무엇을 하고 싶나요?」
진로 상담을 끝마치고 다들 각기 장래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갈 곳은 제각각인 와중에도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질 조건은 학원을 떠나는 것이었다. 당연하겠지. 어른이 되면 학원은 졸업하고 남을 명분이 사라지니까. 하지만, 그럴 거라면…… 처음부터 여기 가둬놓지 말 것이지.
모두 떠나간다. 갈 길이 있었다. 그 사이에서 세이라는 웃으며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야죠. 할머니와 함께 센베 가게를 할 거예요. 태연을 가장하는 말이었다.
졸업할 때까지 할머니는 그 자리에 있어줄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 다음은? 학원에서는 홀로 서는 법 같은 건 가르쳐주지 않는다.
12년을 온실 속에 가두어 키워놓고 갑자기 내보내면, 삭막한 바깥에서 꽃은 홀로 살아갈 수 있는가. 하물며 바다까지 앗아가 버린다면. 부푸는 상상에, 상상을 먹고 무거워지는 두려움에 짓눌리려 했다.
그렇게 바닥을 향할 뻔한 고개가 다시 위를 향할 수 있던 것은……, 하늘이 눈부셔서 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
감정의 표출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리 소리 내어도 닿지 않았던 경험이 뼈아프게 남았던 것일까. 소리 내는 일을 무섭게 여겼다. 반면 앨리스를 쓸 때는 어차피 스스로에게조차 들리지 않는 소리라며 의식하지 않았다.
오히려 겉으로 내보이지 못한 수많은 감정들을 담았다. 슬픔, 두려움, 그리움, 나약함, 정말로 저 먼 외계에서 누군가 그녀의 소리를 들어주었더라면 그만 하라며 차단해버리지 않았을까. 그녀에게 앨리스 사용은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을 표출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사용하는 일은 처음일까. 앨리스를 사용하여 담은 소리 중에, 감정 중에, 가장 고르고 고른 것. 예쁘게 피어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가다듬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누군가에게 닿길 바라며, 닿을 것을 상정하고 부르는 앨리스. 스스로도 처음 써보는 형태의 발동에 평소와는 조금 다른 감각을 느꼈다. 소리가 퍼지는 감각이 선명해지며 소리 위에 빛이 입혀지는 것과 같은 반짝이고 온화한 느낌. 소리를 내는 일이 어렵지 않다고 느꼈다.
제 하늘에게 닿도록 멀리멀리 보내주세요. 소리를, 감정을.
문을 두드려준. 손을 내밀어준. 내딛을 용기를 준 당신에게 감사를. 그리고 친애를.
──있지요. 기억하나요? 나중에, 우리가 졸업을 하고 어른이 된 이후에도 제 이야기를 들어주겠다고 했던 것.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했던 것.
아리사 군은 그 때 이미 한 번 제게 안도를 주었어요. 두려워하던 미래에 가장 바라던 말을 덧씌워주었어요.
행복을 돌려주겠다고 했지만, 이미 저는 당신에게 행복을 받았어요.
그러니 저는 한 번 더 기대를 걸고 싶어요. 다음이란 말을 쓰며 미래를 기다리고 싶어요. 제게 「다음」을 용기 낼 수 있게 해준 아리사 군을 위해서. 먼 미래에도 당신에게 제 소리가 닿고 있기를, 제가 당신의 소리를 듣고 있기를.
[아리사 군의 앨리스에 제 목소리는 어떤 식으로 닿을까요.
조금 궁금하네요. 나중에, 들려주시겠어요?
저도 듣지 못한 제 목소리가 당신에게 어떤 것을 전해주었는지.]
───말로, 글로 다 담아낼 수 없는 당신을 향한 마음이 닿기를.
마지막으로 마침표를 찍고 편지 봉투에 편지를 봉하였다. 줄무늬 고양이 모양의 편지 봉투에 스티커는 고양이 발바닥 무늬. 조금 유난스러울 정도로 귀여운 편지 봉투와 함께 오르골을 작은 상자에 담는다. 그가 기뻐해줄까? 전해 받을 그의 얼굴을 상상하며 세이라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수습하느라 힘들었어요.
이것도 여담인데 이걸 이미지 파일로 떠서 주느라 로그 쓰는 파일 따로, 편집 파일 따로 둔 덕에 정작 건네준 이미지 파일과
이쪽에 업로드 글의 편집이 소소하게 다를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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