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넵은 그만 각오를 하고 테마리를 마주 보아야 했다. 테마리는 배틀을 좋아한다. 수시로 쌓이는 화는 어딘가에 쏟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오기가 강했고 고집을 부리는 성격이었다. 남 앞에서 약해지기도 무너지기도 싫었다. 자유롭게 살아가는 영혼이었을 것이다. 돌산, 숲, 들판을 뛰어다니며 있는 자신의 쌓인 감정들을 자유롭게 해소하며.
그리고 이런 테마리를 제 곁으로 데려온 건 디모넵이었다.
디모넵은 테마리의 벗겨지고 피 맺힌 두 손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몇 번이고 약을 발라주어도 금세 다쳐오고 포켓몬센터에서 치료를 해도 만연한 흉터는 사라지지 않았다. 혼자서 바위를 때리고 나무를 꺾는 모습을 그의 뒤를 쫓아 몇 번이나 목격했을까. 그럴 때마다 자신감을 잃었다. 회의감을 느꼈다. 내가 너를 구속하고 있어도 되는 걸까. 고민했다.
나는 네 바람을, 꿈을, 욕망을 다 들어줄 수 있을까.
그러나 자유롭게 해주지도 못하고 그저 동반할 뿐인 여행을 이어가다 자귀마을에서 처음으로 테마리와 제대로 된 배틀을 해봤다.
결론은 슬프게도 미지근한 온도. 자귀마을의 추위를 이길 만큼 테마리를 뜨겁게 달궈주지 못했다. 그 속에서 들끓는 마그마를 토해내도록 해주지 못했다. 트레이너로서의 디모넵이 부족했던 탓이다.
돌아와서는 제 성이 다 풀리지 않아 씩씩거리는 테마리 앞에서 디모넵은 정말로 고민했다. 이럴 바에야 너를 네 하고 싶은 대로……. 네가 여기서 부자유하게 지내느니 말야. 내 욕심에서 너를 놓아주는 게 맞지 않을까?
바로 그 때였다. 디모넵을 한 번 툭, 그리고 자기 가슴을 툭 치며 테마리는 말했다.
‘다음. 다음에야말로 내 차례를 줘.’
그제야 비로소 디모넵은 깨달았다. 사소한 일로 기분이 나빠져 주위의 모든 것에 덤벼드는 성격. 순식간에 격렬하게 화를 내면 도망갈 틈이 없다. 항상 화를 내고 있다. 이유 없이 화내고 날뛰기 때문에 가까이 가면 위험하다. 예고도 없이 화를 낸다. 그 수많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테마리는 한 번도 디모넵에게 난폭하게 군 적이 없다. 테마리의 화는 늘 바깥을 향해 있었다. 자신의 소중한 바운더리를 건드리지 않은 채.
주먹에 남은 무수히 많은 상처는 그 증거였다.
「마구 난동을 부려 모두가 곁을 떠나면 고독을 참지 못하고 또 화낸다.」
바위를 때리는 일이 고독을 참고 견디는 일보다 아프지 않았다. 솟구치는 화를 참을 수 없었지만 디모넵에게도 테리와 다른 포켓몬에게도 난폭하게 굴지 않았다.
그것이 말하지 않은 테마리의 진심이었다. 그걸 깨달았기 때문에 디모넵은 더 이상 테마리를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이건 내가 네게 주는 선물이야, 테마리. 앞으로 우리 더 강해지고, 더 많이 싸워서 이기자. 늘 너의 차례를 준비해둘게.”
우리를 받아들여줘서 고마워.
그 상처투성이 두 손에 글러브를 끼워주고 자주색의 리본을 묶어주며 디모넵은 성내지 않는 테마리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 두 번째, 테루테루의 경우
처음 만났을 적부터 테루테루는 도망가기 바쁜 아이였다. 겉보기에 험상궂은 인상이나 인상만큼이나 매섭게 노려보는 얼굴, 공격, 그 모든 것이 쉽게 도망가기 위해서라니. 도감 설명을 보고도 신기해서 디모넵은 처음에 테루테루를 놀라게 하길 좋아했다. 왁! 테루테루, 나 여깄다? 여기야 여기. 이리저리 신출귀몰하게 나타나는 디모넵에게 화들짝 놀라다가 와작, 깨물기도 여러 번. 어쩌면 테루테루의 물기가 상대를 풀죽게 하지 못하는 건 언제나 디모넵이 풀죽지 않도록 힘조절을 하는 데 익숙해져버린 탓일지도 모른다.
처음엔 피가 철철 나도록 세게 깨물고 도망가던 테루테루는 그게 하루, 이틀, 삼일, 며칠을 이어지자 나중에는 더는 도망가지도 않게 되었다. 포기한 거였겠지. 이 사람은 이상해. 그렇게 쳐다보는 것도 같았다.
그제야 테루테루는 낯가림을 버렸다.
첫 전투에 테루테루를 세우 건 디모넵의 도박이었다. 이대로 도망치기만 해도 괜찮지만 한 번쯤 이겨보면 배틀이 즐거워지지 않을까? 그 생각은 잘 들어맞아서 테루테루는 그 뒤로 배틀을 앞에 두고 무작정 도망칠 생각만 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애교를 부리면 상대의 때리는 게 좀 약해져. 내가 강하게 물면 상대가 풀이 죽어 움직이지 못하게 되기도 해. 내가 이렇게 하면, 저렇게 하면. 신기하게도 테루테루와 디모넵은 서로가 초보이면서도 합이 잘 맞았다.
테루테루는 배틀이 조금 즐거워졌다. 야생에 머무는 채로는 알 수 없는 감각이었다. 그런데 테루테루에게 배틀의 즐거움을 알려줘 놓고 트레이너는 어느 날부터 의기소침해져갔다.
“테루테루. 기절할 정도로 무리시켜서 미안해. 너를 더 강하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지게 해서 미안해.”
무엇이 그렇게 미안하고 슬픈 걸까. 배틀이 즐거운 만큼 반대로 테루테루는 져도, 기절해도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몸의 힘이 풀리고 쿵,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그 순간이 달가운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한숨 자고 일어나면 금세 아픈 곳은 사라지고 디모넵이 있었다.
배틀이 끝나면 디모넵은 늘 테루테루를 꼭 끌어안아주었다. 어디 상처가 남지는 않았는지 꼼꼼히 살펴주었다. 그러고 나면 꼭 무시무시한 엄니 위로 뽀뽀를 해주었다. 배틀에서 져도 이겨도 승부의 다음을 기다렸다. 그 시간이 싫을 수 없었다.
그런데 트레이너는 그런 테루테루의 마음을 잘 몰라주는 것 같았다. 미안해할 땐 뽀뽀도 해주지 않았다.
‘나는 디모넵과 마음이 잘 맞는 줄 알았는데.’
테루테루가 침울해져 있을 때에 달래준 건 테리였다.
‘디모넵은 한 번 자기 생각에 빠지면 눈치가 없어요. 테루테루가 먼저 안아주세요.’
부드러운 잎사귀가 등을 두드려주어 테루테루는 디모넵에게 먼저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늘 테루테루에게 먼저 손을 뻗고 안아주던 건 디모넵이었다. 부끄럼쟁이 테루테루는 이제까지 자기가 먼저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안아줘야지. 디모넵을 꼬옥 안아주고, 또 안아달라고 해야지.’
어쩐지 테루테루는 몸이 뜨거웠다.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지금이라면 키도 쑥 자라서, 디모넵이 안아주길 기다리지 않고도 안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테루테루는 빛무리에 안겨 디모넵을 찾았다.
그 세 번째, 테리의 경우
디모넵과 테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쭉 함께였다.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다지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포켓몬도 인간도 태어나 사물을 인지하고 사고가 자라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고 그 정도로 자라나고 나면 사소한 부분에는 의문을 갖지 않게 된다.
그러니까 디모넵과 테리는 쭉 함께였고 서로가 서로의 일부와 같았다. 디모넵은 테리의 모든 걸 이해했고 테리는 디모넵의 모든 걸 알았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그랬었다. 하지만 사실은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포켓몬과 인간이 다른 만큼.
아이의 성장은 눈부시다. 디모넵의 성장은 꽃향기마을이란 작은 화분에서 라이지방으로 분갈이를 한 뒤 눈부시게 이루어졌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몰랐던 걸 알게 되고 부족한 것을 채워 넣었다. 때론 슬퍼했고 어떨 땐 두려워했으며 분함을 느끼기도 했다. 테리는 그 모든 순간에 함께했다. 분명 옆에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옆에 있으면서도 거리가 벌어짐을 느꼈다.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 찾아왔다.
이해가 따르지 않는다. 나란히 걸을 수 없다. 부족함을 느꼈다. 테리는 여전히 예전의 그 자리에 있는데 디모넵이 손닿지 않았다.
언제 자신이 아이가 아니게 되었는지 테리는 몰랐다. 열매인 자신에게 그런 개념은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차이가 생겼다는 것이다. 디모넵은 성장하고 테리는 그 자리에 머무는 차이.
「테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알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는 서로 아는 만큼의 노력을 하고 있다. 너는 내가 아니고 우리는 같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테리가 이렇게 제 품에 안겨있는 건 말이 통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진심이었다.」
“테리. 나한테 알려주지 않을래?”
어느덧 꽃이 필 시기가 되었다. 환하게 빛나는 테리를 품에 안은 채 디모넵은 웃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 나는 전부 듣고 싶어. 내게 알려줘. 그러나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쌓여 자연스럽게 찾아온 그 변화 앞에서 테리는 여전히 어떤 답도 할 수 없었다.
‘디모넵. 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아이는 디모넵이 아니라 나였나 봐요.’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요.’
‘어째서 이렇게 슬픈 걸까요.’
‘디모넵. 저는, 디모넵에게……’
야속하게도 제 의지를 벗어난 몸의 변화에 테리는 갈라지는 꽃잎들을 있는 힘껏 붙잡고 웅크렸다.
‘이런 저를 보지 말아주세요.’
의무적으로 쓰려고 한 건 아닌데
모두 서사적으로 필요해서 정말 힘내서 썼었네요 진화로그
테리의 경우엔 앞서 쓴 것처럼 순전히 전력적으로 필요해서+진화가 이득이니까 메타적 선택이 조금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