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리는 아직도 글러브를 툭툭 두드리며 성을 내고 있었어요. 아무래도 테마리의 화는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아요. 그야 그럴 만도 해요.
「테마리, 실수투성이 트레이너라 미안해. 그래도 믿고 있어. 불꽃펀치!」
그렇게 말해놓고 속으로 ‘나인테일은 에스퍼 타입의 공격을 하겠지. 사이코쇼크는 무척 강력하던데. 테마리가 그대로 기절해버리는 게 아닐까? 또 지는 게 아닐까.’ 생각해버렸거든요.
그래서 사이코쇼크의 아찔함을 견뎌내고 온몸이 너덜너덜해져서는 그 고통까지도 분노로 승화해, 나인테일에게 불꽃펀치를 때려 박는 테마리를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했어요. 어? 하고 바보 같은 소리만 내면서 혼자 글러브 낀 주먹을 높이 쳐들고 승리를 만끽하는 테마리에게 한 박자 늦게 반응해준 거예요.
테마리는 눈치가 아주 빨라서 말이죠. 제 반응만으로 제가 사실은 질 줄 알았다는 걸 알아차렸어요.
‘이 몸을 믿는다고 해놓고 사실은 하나도 안 믿다니, 아앙? 네 녀석, 이 몸이 우습냐?’
성원숭으로 진화하고 나서 테마리는 의사소통이 한층 더 발달해서 말이죠.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들리는 착각이 들곤 해요. 왜 있잖아요. ‘밑장 빼면 손가락 잘라간다.’ 하는 류의, ……이 생각도 테마리에겐 비밀이에요.
아무튼 덕분에 저는 시합이 끝나고 나서 포켓몬센터에서 다른 아이들이 회복되는 동안 테마리 앞에 무릎을 꿇은 채 한참을 혼이 났어요. 그 모습을 회복을 마친 테토가 꼬시다고 웃은 건 정말 열 받는 일이었어요. 하지만 이번에도 할 말이 없었어요.
‘디모넵은 내가 혼란에 빠졌을 때도 그랬어. 바보, 바보다.’
할 말은 없지만 열은 받네요. 저는 테마리 몰래 테토의 엉덩이를 찰싹 때려줬어요.
테마리는 군기반장처럼 마지막까지 제게 으름장 놓길 쉬지 않았어요.
‘이 몸의 차례를 준비해둔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겠지? 기다리고 있겠어.’
“네에, 네에. 알아 모시겠습니다.”
저는 그제야 유유히 치료받으러 가는 테마리를 배웅하고서 겨우 저린 다리를 풀 수 있었어요. 그리고 테마리가 치료를 마치면 줄 오늘의 MVP상을 준비했어요.
그 두 번째, 테이의 경우
동굴에서 깨어나 며칠을 동굴만 돌아다녔다. 춥고 서늘하고 차갑고, 테이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풀 타입인 테리가 잎사귀 끝에 성에가 앉아 볼 안으로 들어가던 걸 똑똑히 보았다. 자신은 도마뱀인 덕분일까 테리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발바닥의 흡착력을 이용해 동굴 벽을 타고 돌아다니는 건 갓 태어난 테이에게 소소한 유흥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동굴 밖이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디모넵은 테이가 아직 어리다고 곧잘 안고 다녔다. 털코트 안에 넣거나 무릎에 앉히거나 모자 위에 올리거나, 그 때마다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고향인 꽃향기마을이 얼마나 따뜻하고 풀밭이 드넓은지. 얼마나 다양한 꽃들이 있는지. 가게의 포켓몬들, 디모넵의 아버지, 상냥한 마을 사람들, 맛있는 포핀, 한참 고향 이야기를 하며 그리운 얼굴을 하던 디모넵은 그 다음엔 동굴을 벗어나 나오는 곳을 이야기했다. 눈 덮인 땅, 하지만 라이지방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그 도시 한가운데 위치한 커다랗고 깊은 호수, 그곳의 호수는 여기 동굴 호수와는 다른 걸까.
무엇보다 디모넵이 자주 들려주던 건 햇빛이었다.
“볕을 못 보니까 테리가 축 쳐져 있어. 사실 나도 엄청 시들시들이야. 테이 넌 괜찮아? 도마뱀이라 그럴까. 그렇지만 아이는 햇빛을 봐야 쑥쑥 자라는데. 테리가 얼른 쾌청을 배우면 좋겠다. 그럼 테리도 테이도 기분 좋게 지낼 수 있을 텐데.”
재잘재잘 태양을 이야기하고 테이의 손을 들고 동굴 벽을 향해 가리는 시늉을 했다. 태양빛은 아주 눈부셔서, 볼 때는 꼭 이렇게 손 틈으로 보게 돼. 하지만 눈으로 보기 힘들어도 피부로 느끼게 될 거야. 따뜻하고 포근한 햇살을.
마침내 동굴을 나가던 날, 테이는 드디어 만났다. 눈 덮인 대지 위로 부서질 뜻 무한히 일렁이고 출렁여 넘치는 빛무리를. 하얀 땅, 하얀 하늘, 세상이 온통 하얘서 눈이 멀어버린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날 때에 눈 대신 피부로 와 닿던 따스한 감각.
‘디모넵이 안아주던 것과 닮았어. 닮았으면서도, 조금 달라.’
기분 좋아. 아주 기분 좋아. 나는 이게 좋은 것 같아.
“어라, 테이. 잠들었어? ……햇빛이 맘에 들었나봐. 헤헤. 좋아. 이대로 가자.”
디모넵이 들려준 많은 이야기 중 하나를 만났다. 아직 만나지 못한 게 많았다. 기대를 품었다. 테이는, 나의 트레이너가 내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리라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