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에 들어오자 휑한 반쪽부터 눈에 들어왔다. 제니의 짐은 이미 다 정리되었으니까, 문득 기분이 울적해져 입술을 우물거리다 창문부터 활짝 연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에 정신을 일깨우다가 눈에 들어온 건 화병에 꽂힌 거의 다 마른 장미였다. 이것도 치워야겠네. 아쉬운 기분에 장미를 툭 건드리자 마른 꽃잎이 파스스 부서진다. 아, 이런. 허둥대며 손바닥으로 그 잔해를 모으다가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어 화병을 창밖으로 털어냈다. 안이 비어버린 화병은 그대로 창가에 둔 채 차곡차곡 짐정리를 시작한다.
이건 교재…. 필요한가? 300페이지나 되는 역사서부터 문학, 예법, 마도학, 식물학, 줄줄이 이어지는 교재의 향연에 질린 표정이 된다. 아직 1년도 다 안 쓴 건데 가져가서 도로 팔까 싶다가도 짐이겠거니 싶어 그냥 한 편에 차곡차곡 쌓아올렸다. 혹시 돌아오게 되거나, 아카데미가 나중에라도 다시 열리면 누군가가 쓰겠지.
다음은 옷. 아카데미 제복을 받은 뒤론 한 번도 꺼낸 적 없던 옷가지들은 잘 갠다. 어차피 튼튼하고 질긴 걸로 세 벌 정도, 번갈아 입기 위한 게 전부여서 정리랄 것도 없었다. 그리고 가방에 넣으려다, 오랜만에 만져보는 사막용의 통풍이 잘 되는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내가 이걸 또 입을 일이 생길까? 생각하고는 음, 귀찮네! 옷들도 두고 가기로 했다. 최소한으로 필요한 내의 정도만 챙겨 넣고 나자 여전히 가방이 휑하다.
다음으로 돈주머니와, 용병패, 검 손질 도구, 그리고…… 여기 올 때 가져왔던 몇 가지 소지품들을 마저 넣어도 홀쭉한 건 변함이 없었다. 정말 뭐 안 들고 다니네. 새삼 스스로에게 감탄하고 아직 넣지 않은 것들을 돌아보았다. 이제 남은 건 모두 여기 와서 생긴 것들이다. 헤로드에게 받은 동화책, 로제에게 받은 예법서, 단단한 책들을 바닥에 깔고 그 위로 에르덴이 준 연고와 디셈버의 펜듈럼, 축제에서 산 펭귄 가면과 고양이 가면, 레탈라에게 받은 부적과 펭귄 인형과 이런저런 것들을 챙기다 보니 홀쭉하던 가방이 언제 그랬냐는 듯 빵빵해져버린다. 한 손으로 들어보자 묵직한 감에 푸하핫 웃음이 터졌다. 뭘 이렇게 많이 챙기는 거야? 언제 이렇게 많은 게 생겼지? 가방이 무거워진 만큼, 마음에 담긴 무게도 늘어나서…… 그게 굉장히 낯설고 어색해, 손바닥으로 가슴께를 문질러본다. 무언가 싹이 피어나려던 듯한, 하지만 꽃이 피기 전에 끝나버린.
“너무 짧은 시간이었어.”
그래도 많은 걸 얻었어.
텅 비어버린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고 두 팔을 쭉 벌려 기지개를 켠다. 금세 씩씩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문패를 챙겼다. 좋아, 그만 가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