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말하며 맞잡은 손 위로, 살며시 닿아오던 입술의 감촉이 아직도 피부에 남은 듯 화끈거린다. 못 견딜 정도로 부끄럽게 해준단 말 이렇게 지켜버린 걸까. 정작 행한 그 당사자는 아무런 의식도 없던 걸 떠올리면 부끄럽다가도 우스워져 혼자 키득거리고, 에슬리는 마차의 등받이에 편히 몸을 기대었다.
마차는 급하게 조달한 탓인지 착석감이 그리 좋진 않았다. 그러나 에슬리에게 마차란 그 자체만으로도 귀한 이동수단의 상징이다. 자동으로 움직이는 그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어느새 저 너머로 먹구름이 낀 하늘 아래 어딘지 을씨년스럽게 남겨진 아카데미 건물이 보였다. 이상하기도 하지. 아카데미는 자신들이 있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생겼는데 저 안이 텅 비어있단 생각만으로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다니.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내면서 12년을 비워둔 마음의 빈자리에 추억과 행복과 애정을 쌓았다.그저 수학하기 위해 간 곳이라고, 그 뿐이라고 여기려던 제 생각이 멋지게 비웃음을 당한 것 같았지만 싫지 않은 기분이었다.
아니, 아주 기뻤다.
────처음 그와 마주했을 때의 인상은 어딘지 무해한 미소를 짓는 사람. 사람의 맥이 풀리게 하는 온화함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를 경계하는 사람이 있단 말을 들었을 때도 어째서? 하고 납득하지 못했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건… 가지각색이잖아~…?」
그야 그렇지. 누군가는 벌레를 두려워하고 누군가는 밤을 두려워하고, 누군가는 허상을, 누군가는 피를, 누군가는 다툼을, 또 누군가는 사람을 두려워한다. 그래도 그 가지각색의 범주에 그를 넣고 싶지 않았던 건 제가 그의 앞에선 도통 경계심 같은 걸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납득하지 못하겠단 얼굴을 하는 그녀를 앞에 두고 그는 여상한 목소리로 새로운 두려움을 하나 추가해주었다.
「나 사일란이기도 하고~….」
아아……, 그랬던 건가. 들려오는 말에 반사적으로 그렇다면, 하고 납득해버리는 스스로가 싫어서, 그에게서 지우려던 경계심이 다시 날을 빛내는 게 싫어서, 방어기제처럼 얼굴을 찌푸리고 그의 용기를 쳐내려 했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거야…?」
그는 그녀의 질문에 어딘지 난처한 웃음을 지어 보였지. 마치 별 일 하지 않았다는 듯.
「친구니까 믿었고…. 마찬가지로 친구니까, 이걸로 나를 싫어하게 되더라도… 존중할 수 있는 거야.」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받아들일 수 없었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함께’, 거기에 익숙해진다는 뜻은 반대로 ‘혼자’를 견디지 못한단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나는 그렇게 믿었던 친구들에게 버림받았는데. 버림받고 나서 견딜 수 없었는데. 그런데도 당신은?
「몸이 아픈 건 잘 모르지만, 마음은 나도 똑같이 아파. 이미 한 번, 사일란이란 이유만으로 다 잃었어. 겨우 아무렇지 않게 되었는데 또 그런 일을 겪었다간, …‥정말로 다시 일어나지 못할 거야.」
고슴도치마냥 가시를 세우고 손길을 거부하려는 그녀에게 그는 마치 자신이 상처입기라도 한 듯, 아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너의 상처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고 있었구나. 무섭겠지. 알아….」
당신이 나의 뭘 이해해?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해해주어서 기쁘다고, 생각했다면 너무 비겁했을까. 같은 사일란이니까. 당신도 나와 같은 고통을, 아픔을 겪었을 테니까. 그래서,
때문에 내밀어진 손을 내치지 못했다. 한 번만 더 믿어보라는 그 손을 잡아버렸다.
「크든 작든 상실은 불가결할 거야. 모든 건 결국 스러지니까. 잃지 않을 수 있는 건 없지…. 그렇기에 더 지키고 싶어.」
「잃지 않은 것들을, 소중히 여기자. 나도 그렇게 할게. 내가 할 수 있는 한, 에슬리가 나로 인한 상실감을 느끼게 하지 않기 위해… 나는 항상 애쓸 거야.」
「난 욕심이 많아서… 내 친구와, 함께 행복해지고 싶나봐.」
이곳에 와서 다행이라고 말해준 당신 덕분에, 나도 이곳에 와서 다행이라고 여길 수 있었다.함께 행복해지길 바랄 수 있게 되었다. 더없이 상냥하고 다정했던 친구, 소중한 루. 당신에게 받은 온기를 헛되이 하지 않도록 나는 더 강해질 거야.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펴본다. 마지막으로 들렀던 곳이 눈 덮인 정원이었던 탓일까. 지금은 온기는커녕 조금 차갑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손이 분명 누군가의 온기를 받고, 또 온기를 주었던 것을 분명히 기억한다.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던, 익숙해지기 두려웠던 일. 그랬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어색하고 멋쩍고, 마치 남의 옷을 걸친 기분이었다. 그런 동시에 기쁨과 설렘 또한 숨길 수 없어, 훅, 한숨을 내뱉고는 열이 오른 뺨에 손등을 대었다.
태풍이 그치면 만나. 그 때는 함께 잃어버린 것들을 찾고, 곁에 있을게.
“벌써부터 그리워져서 어떡하지, 루?”
헤어짐은 익숙하다. 하지만 재회는 익숙하지 않다.
‘이번에도 익숙해질 수 있도록, 내게 가르쳐줄 거야?’
그렇게 물어보면 그는 어떤 답을 해줄까. 아마도, 그녀가 좋아하는 그 무른 미소를 보이며 얼마든지. 하고 답해주겠지.
잘 지내, 어디선가 그런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그래서 그가 있을 마차를 향해 고개를 빼들고는 그 말에 답하듯 또 만나, 하고 입 꼬리를 활짝 당겨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