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오기도 전에 목새마을은 일찌감치 눈이 내리기 시작했어요. 그보다 이 지역은 언제든 눈이 내리고 있어서 새삼스럽지도 않네요. 14년을 눈이 내리지 않는 지역에서 자랐는데 이사한 곳은 1년 365일 눈이 덮인 곳이라니 저도 참 중간이라는 게 없나 봐요.
그렇지만 처음 즐긴 목새마을의 여름은 기분이 좋았어요. 선로의 건너편은 아직 눈이 남아 있었지만 마치 밀물과 썰물의 경계가 달라지듯 눈이 녹은 지역이 점점 더 넓어져서, 그 아래로 대신 푸석푸석한 갈색 풀들이 드러나고 머지않아 1년에 한 번, 짧은 여름동안 햇빛을 받아 푸른색을 되찾았거든요.
목새마을의 여름은 꼭 기적만 같았어요. 아름답고 생기 넘치고 푸르고 시원한 계절. 처음 겪어보는 계절이었죠. 그러다가, 에취.
금세 재채기가 나오는 계절이 되더라고요. 겨울의 냄새가 순식간에 닿았어요. 추운 건 싫은데, 이렇게 금방 공기가 차가워지다니 솔직히 조금 움츠러들게 되더라고요.
“그치이, 테리. 추운 건 싫어.”
우리집 풀 타입 아이들의 잎이 얼거나 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쓰며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했어요. 팔름 씨가 주신 집의 방한에 심혈을 기울이고 정원의 온도를 자주 확인하고 수로는 잘 작동하고 있는지, 그 외에도 아주 많이. 일만 한 건 아니에요. 10월에는 할로윈이 있었고 11월에는 빼빼로 데이가 있었거든요. 오드리 언니랑 호박 속을 파내어 랜턴을 만들거나 속이 빈 녀석으로 가면을 만들어서 펌킹 흉내를 내며 사탕을 모으거나, 할로윈은 사실 좋아하는 행사가 아니었어요. 고스트 타입도 싫어하는데 고스트 타입들이 활개를 치는 그 날을 좋아하기란 어렵지 않나요? 사탕 같은 건 그 날이 아니라도 언제든 먹을 수 있는 거고요.
하지만 이제는 고스트 타입을 무서워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용기를 내서 돌아다녔죠. 그 때 받아온 사탕은 목새연구소에 전부 기부했어요.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것도 좋지만 어차피 아이들은 할로윈의 수확으로 일주일은 배부를 테니까, 이럴 땐 당분이 왕왕 필요한 어른들을 챙겨주어야죠.
그러고 빼빼로 데이엔 오드리 언니랑 빼빼로를 만들고, 완성된 그걸 폴이 있는 곳까지 배달해주기도 하고, 정말 하루가, 또 한 달이 지나가는 게 어떻게 이렇게 순식간인지 모르겠어요.
“이건 어때, 디모넵?”
“우와아, 귀엽지 않아요? 언니에게 잘 어울리겠어요!”
“그런가? 저기, 넌 어떤데? 디모넵의 취향.”
오늘은 오드리 언니와 겨울옷을 사러 나왔어요. 백화점은 아직도 혼자 들어가긴 어려운 곳인데 오드리 언니는 거침없이 들어가서는, 점원이 다가오건말건 서슴없이 행동하지 뭐예요. 점원은 어디까지나 오드리 언니의 말을 기다려야 하는 거예요. 여왕님의 포스 같아, 멋져!
“제 취향이요? 어어, 자, 잘 모르겠는데.”
“그럼 안 돼! 자기한테 어울리는 게 어떤 건지, 좋아하는 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지.”
이제껏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단 말이죠, 그런 거. 오드리 언니랑 매번 쇼핑을 다니면서 간신히 조금 알아가는 중이지만 여전히 말이에요.
결국 한참 언니와 이 옷, 저 옷 씨름을 하다가 쇼핑백을 한가득 들어버리고 말았어요. 그 중에서 나란히 고른 코트와 목도리만 꺼내 두르고 나머지는 배송을 부탁했지만요.
목도리도 말이지. 그냥 칭칭 감기만 하는 건 멋이 없잖아. 말하면서 언니는 귀여운 매듭을 보여주었는데, 그 작은 차이 하나로 느낌이 굉장히 달라졌어요. 배움의 길이란 정말 끝이 없구나.
목도리는 포근하고 따뜻했어요. 언니가 고른 코트는 가벼우면서도 보온 효과가 좋았고, 언제부터인가 높이 올려 묶는 대신 풀어두게 된 오드리 언니의 긴 머리카락이 목도리 안으로 숨어들어서, 분홍색과 붉은색의 조합이 좋다고 문득 생각했어요.
바깥은 싸늘하고 흰 공기가 깔려 있었어요. 낮인데도 햇살이 잘 비치지 않고 대신 구름이 깔려 있었어요. 곧 눈이 오려 그러는 걸까요? 목새마을도 공식적인 첫 눈은 아직이었어요. 누림마을도 아직 눈이 내리지 않은 채였죠.
“첫 눈이 머지않았네요.”
첫 눈 내리는 날엔 언니를 만나러 갈까나. 설레는 단어잖아요. 처음이라니. 올해의 끝인 동시에 겨울의 시작 같기도 하고, 캠프가 시작하던 시기가 떠올라서 어쩐지 같이 있고 싶어지지 뭐예요.
“겨울에 디모넵을 만났었는데 말이지.”
언니도 저랑 비슷한 생각을 했나 봐요. 칙칙한 하늘을 보며 걸음을 멈춘 오드리 언니는 그대로 한참 새하얀 입김을 뱉다가 곧 고개를 내리고 웃었어요.
처음 만나던 시절엔 상상도 못하던 표정으로 웃어주었어요.
“일 년이나 나랑 같이 어울려줘서 고마워, 디모넵.”
그게 굉장히 쑥스럽고 수줍고, 또 벅차는 기분이었어요.
캠프를 시작할 때만 해도 말이죠. 오드리 언니와 이렇게 쇼핑을 가거나 맛있는 걸 먹거나 추운 날 벽난로를 쬐며 마주 앉아 떠들거나 그런 상상은 못했는데.
처음 만났을 적부터 언니와 친해지고 싶었다는 이야기, 제가 했었던가요? 그 때도 이미 언니는 무척 멋있고 또 반짝여서, 그게 아니더라도 왠지 이 사람과 친해지고 싶다는 예감이 들어서, 나는 아주 오랫동안 말이에요.
“언니가 이런 말 해올 줄은 몰랐는데~”
그래서 괜시리 쑥스러움을 숨기고 언니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는 시늉을 했어요. 아닌 게 아니라, 과거의 저라면 언니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줄 몰랐을 거예요. 캠프에서 보낸 3개월은 우리가 성장하는 발판이 되어주었고 서로의 몰랐던 점을 알게 해주었고 그렇게 한층 좋은 관계를 이루도록 도와주었어요. 하지만 캠프라는 계기가 있었어도 우리가 노력하지 않았더라면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 거예요.
그 여러 가지 마음들이 겹치고 쌓여 지금을 이루었다는 게 정말이지, 멋지지 않나요? 기적처럼요.
“저도요. 언니랑 같이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아요. 그러니까 이르지만, 내년에도 잘 부탁해요.”
1년의 감사와, 1년의 약속을 담아서. 수줍음을 이겨내고 히죽 웃자 두 뺨에 열이 올라서 추운 것도 잊어버리고 말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