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제롬
「소중한 타인을 잃는 장면에서는 꼭 비가 내리곤 한다던가요. 그에 비해……」
현실의 불행이란 극적이지 않은 법이다. 당신의 비극이 어떤 전조도 없이 일상에 그림자처럼 덮쳐온 것처럼, 나의 불행이 예고 없이 튀어나온 못에 걸린 것처럼. 때때로 에셸은 조명 받지 못하는 불행들이 이 넓은 세상에서 우리는 고작해야 점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 같다고 느껴졌다.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는 자리에서 수많은 개인이 각자의 불행과 고독한 싸움을 이어나간다. 그들 중 누군가는 싸움에 무릎 꿇고, 누군가는 무너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그게 참 공평하지 못하게 여겨졌다. 무척이나 쓸쓸했다. 그럴 때에 누군가 당신의 힘듦을 알아주고 위로가 되어준다면 우리는 좀 더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세계가 조명하지 않는 작은 귀퉁이에서 만나, 점과 점을 이어 서로를 지탱하는 선을 이룬다면.
──놓지 말라고,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바보 같을 정도로 쉽게 맥이 풀렸다. 그에게 손을 잡힌 채로 카페로, 바다가 보이는 탁 트인 해안가로, 바닷바람이 부는 그곳으로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보폭 차이가 상당히 날 텐데도 불구하고 가뜩이나 굼뜬 걸음이 뒤처지는 일은 없었다. 한 손에 든 그의 표현에 의하면 멍청해질 정도로 단내 나는 음료를 입에 물다가 불시에 웃음이 나왔다. 어떤 신호였다.
“아무리 그래도 멍청해질 정도로 단내가 나다니, 그건 너무한 표현이었어요. 이번만은 따님에게 혼나도 편 못 들어주겠어.”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저보고 적응하라는 건지 딸에겐 이르지 말라는 건지. 투덜거림을 들으며 머리가 핑핑 돌 정도로 단맛 나는 걸 한 모금 더 마셨다. 지독한 단맛에 초콜릿 하이가 올 것 같았다. 그거 알아요, 제리 씨? 아래로 갈수록 따뜻해져서 과일이 달거든요. 다음엔 딸기청이 들어간 걸로 제가 살게요. 그것도 맛있어요. 파이 만드는 기술을 보면 이런 것들도 사먹을 법한데 늘 남 주는 것만 익숙해서 자기 입에는 넣을 줄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옆에서 넣어줄 사람이 있어야지.
그가 먼저 바다로 이끌 줄은 몰랐다. 사실 난 바다를 무서워해요. 나오는 잔잔한 고백을 듣는다. 에셸에게 배가 불편한 장소로 기억되는 것처럼 그에게는 바다가 버거운 기억일 줄로만 알았다. 꾸물거리는 물이 날 삼킬 것만 같아. 얼마나 오랜 시간 악몽을 꿨을까. 당신을 삼키고 소중한 사람을 삼켜버린 바다. 새까만 해저로 먹혀버리는 감정들.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들을 바다에 빠트려 묻거나 불에 태워 재만 남기거나, 그렇게 해서 달려온 세월이었을 거라 미루어 짐작하였다. 하지만 그렇지, 피차 긴 세월이 흘렀다. 저의 표현을 빌리자면 좋은 기억으로 덮어버릴 만 했고 당신 입을 빌리면 승화시켜 새로운 의미를 가진 걸 테다. 이제 와서 경찰이 되지 않았다면 무엇을 하였을지 물어봐도 될까.
지금의 당신은 바다를 좋아한다고도 답할 수 있을까. 이중적인 감정의 틈에서. 똑바로 응시해오는 그의 눈빛이 종종 버겁다가도 피하는 대신 마주 보았다. 기다려준 만큼 답이 천천히 흘렀다.
“‘기억은 덮는 것이 아닌 승화시키는 것이다. 결국은 마주해야 한다.’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 말을 오랫동안 곱씹었어요.”
그 때는 닥쳐온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제가 잘못해 왔던 걸까? 하는 생각부터 덜컥 들었거든요. 이 방법이 틀렸던 걸까. 이게 아니었을까. 그냥 모든 게 제 잘못만 같았어요.
“그런데 표현이 다를 뿐이라고 해주시네요.”
고마워요. 둥글게 눈을 휘며 말을 잇는다. 파도소리에 묻히지 않도록 조금 더 배에 힘을 주었다. 당신은 알아서 잘해낼 거라고 했지만 그렇게 잘하지만은 못했는데요. 맞아요. 도와줄 사람이 많았어요. 그래서…… 아직 다 괜찮다고는 못하지만 괜찮아질 거라고 할 수 있게 됐어요. 앞으로 계속해서 저는 더 괜찮은 길로 나아갈 거라고요.
그러고 나니까 나쁜 기억이란 승화되는 것 같기도 하고 반창고를 붙이듯 덮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감정이란 당신 말처럼 이중적이어서 괴롭고 고통스러운 만큼 제게 소중한 것을 일깨워주기도 했어요. 저는 상처가 인간을 성장시킨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지만…… 상처를 이겨낸 사람들은 그만큼 더 강해지는 게 맞나 봐요.
“어때요. 저도 더 강해진 것 같나요?”
장난스럽게 묻고는 잠깐만요. 그에게 제 몫의 음료까지 맡기고 별 것 아닌 일처럼 장갑을 벗었다. 근래 한 가지 또 깨달은 점이 있었다. 장갑으로 흉터를 감추는 일만큼이나 에셸은 맨손에 닿는 감촉을 좋아했다. 이를 테면 머리를 쓰다듬거나 뺨을 만지거나 손을 맞잡거나 할 때 장갑을 벗는 일이 번거롭지 않을 만큼 매번 그렇게 닿고 싶었다. 장갑채로는 전해지지 않는 온기가 애틋하기만 했다. 자, 다시 잡아줄래요? 흉이 보이는 손등을 내민다. 이번엔 감춰달라는 뜻이 아니었다.
“예전에 그랬잖아요, 제리 씨. 행복해지고 싶은지조차 확실치 않다고.”
결국 당신은 저를 찾아주었고 지금 이렇게 행복해지는 방법을 하나, 둘 알아가고 있어요. 달링, 행복이 그 손 안에 쥐어지던가요?
“지금이라면 대답이 다르게 나오겠죠?”
우리의 변화는 차근차근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여자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인정하는 말을 하지 못해도 괜찮았다. 그의 마음은 증오를 불태우는 데만 20년을 쏟아 이제는 그 횃불 아래 미약한 재밖에 남지 않았고, 발길은 잿더미 위에서 허무해진 마음을 어떻게 채워야 좋을지 몰라 빈 터 위를 배회하기만 했다. 손 안에 쥔 이것을 또 잃을까 연연하고 겁을 먹는 사내의 손을 그래서 이번엔 제가 놓지 않았다. 그가 이것을 익숙하게, 또 당연하게 받아들이기까지 서두를 것 없이 천천히. 물든다는 건 그랬다.
여자는 인정했다. 저는 제법 뻔뻔하고 또 끈질겼다. 바보 같을 만큼 시답잖아도 손해만 보는 역할만 같아도 연민도 동정도 아닌 천상 그런 사람이라서. 피차 작은 점 하나로 찍힌 세상 아래에서, 좀 연결되면 어떻느냐고 말하고 싶었다.
“사실은요. 책임도 의무도 주지 않고, 잃지 않을 거라 확신을 주겠다고 말하려다가 살짝 자신을 잃을 뻔했거든요. 그런데 당신 말처럼 제 곁엔 도와줄 사람이 많고, 당신도 절 도와줄 한 사람이고. 그래서 괜찮을 거란 생각을 했어요.”
반대로 당신이 잘해낼 수 있도록 제가 도와줄 수도 있고요. 이번 기차 사건을 겪으면서 배운 것 중 하나였다. 그 십 여 년 전 과거와 지금은 달랐다. 허무할 수 있었다. 당신이 불태운 20년이.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지도 몰랐다. 그러나 정말 그렇진 않을 거라고 잿더미를 파헤쳐 찾아내고 싶었다. 당신이 20년에 걸쳐 이뤄온 많은 것을. 또 그 중 하나를.
당신은 이미 지켜내는 경험을 했다. 어엿하게 성장한 딸을 통해서. 그리고 지금도 이어오고 있었다. 어느덧 품에 안은 그 여러 포켓몬들이 증거다. 그것을 아직도 본인만 모른다.
“저도 노력할 테니까 같이 노력하기로 해요. 스스로를 믿어주세요. 당신은 지킬 수 있는 사람이에요.”
혼자 지키려하지 말고요. 망설이고 머뭇거려도, 거듭 부정해도, 물러나려다가도 끝내는 잡은 손을 놓지 못하는 상냥함과 미련에 기대어 색이 다른 두 눈의 초점을 맞춰 응시해오는 남자를 놓치는 법 없이 마주 보았다. 서로간에 채근할 것 없다.
바닷바람에 실려 봄기운이 물씬 밀려왔다. 그렇지, 남쪽으로 내려가면 어느덧 이른 봄이 기다린다. 답은 그 때 들어도 늦을 것 없겠지. 오랫동안 무리하고 갇혀있던 기억 속에서 당신은 막 벗어났을 뿐이고, 허전한 마음을 채워가기에 아직 남은 여정이 길었다. 다만 어떤 주문처럼 한 번 더 속삭였다.
『우린 앞으로 더 괜찮아질 거예요.』
제롬 씨에게 희망찬 이야기를 잔뜩 해주고 싶었어요. 점과 점이 만나 선으로~ 좋아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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