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알속에서 머물던 당시의 기억들은 대개 분명하지 않다. 기실 이 작은 포켓몬은 그 당시의 기억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좋았어. 따뜻했지. 목소리가 들렸어. 날 기다려줬어. “러블링~” 그 정도면 충분하다. 어둠대신은 충분히 사랑받았고 태어날 때가 되어 마땅히 태어났다.
고스트 타입의 기원이 무엇인지, 저는 생물인지 혹은 천을 뒤집어쓴 에너지 덩어리인지 이 포켓몬은 관심이 없었다. 알 필요도 없었지.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그런 복잡한 사유를 하는 건 인간 정도가 아닐까? 알을 깨고 태어난 포켓몬은 단지 세상이 재밌었다.
세상이 즐거웠다.
2
처음으로 손을 갖고 싶다고 생각한 건 트레이너의 지나가는 말이었다.
「이 아이도 진화하면 멋진 두 손이 생기더랍니다. 분명 유니도 팔이 생기면 루미 씨를 안아주기도 하고 할 게 많아지겠어요.」
손이 생겨? 트레이너를 안아줘? 바나링은 에셸이 좋았다. 네 곁에 있으면 사랑스러운 기분이 잔뜩 생겨나. 안쪽에서 따뜻한 것이 몽글거리고 뭉쳐. 이 천 아래를 열어본다면 분명 널 닮은 분홍색 솜이 있지 않을까? 나는 에셸의 아이니까.
진화. 손. 트레이너를 안아주는 행위. 네가 나에게 해준 것처럼 나도 너에게. 틀림없는 사랑이었다.
3
열차가 흔들리던 순간, 바나링은 볼 밖에 나와 있었다. 굴러가는 다이아를 따라 날았지. 데굴데굴데굴, 빙글빙글빙글. 갑자기 기차의 천장이 찢어지고 모르는 사람이 떼거지로 등장해도 이 천진난만한 포켓몬에겐 전부 재밌기만 했다.
“우리는 헬릭스단, 라이지방의 지하세계를 지배하는 힘의 상징이다!”
처음 맛 본 강렬한 감정. 트레이너는 알지 못하나 바나링의 첫 식사는 바로 이 자리였다. 냐미링이 지키는 트레이너를 두고 그릇된 욕망과 질투, 원한, 그 비열한 감정들을 접했다.
불량식품만 같은 것이었다. 어린 포켓몬에게는 몹시 해로웠다.
4
그 날부터 어둠대신은 눈을 떴다. 바나링은 에셸을 좋아한다. 바나링은 에셸을 사랑한다. 그러니 맹목적으로 바랄 뿐이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네게서 날 채울래.
네 슬픔, 네 불안, 네 공포, 네 두려움, 네 원망, 네 무력함, 네…… ……네가 내게 줄 수 있는 가장 맛있는 것들. 이 안에 너를 사랑하는 저주를 가득 담아줘.
5
──그런데 저 작은 불켜미는 왜 자꾸 날 방해하려는 걸까? 불꽃이 성가셔. 내 몸을 태울 것만 같아. 내가 에셸의 곁에 있는 걸 방해해. 너만 없으면.
아. 지금이라면 두 팔이 자라날 것만 같았다.
쓰면서 좀 좋아했던 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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