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라한 귀하
“그야, 이리도 생생한걸요.”
“그거 나 부끄러우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
배경으로 지나가는 무수히 많은 물음표는 대나무통에 쏘옥 넣어버리고 시치미를 뗀다. 아니라면 내가 꼬렛 구멍을 찾든 라한 씨를 얼렁뚱땅 넣어버리든 하는 수밖에 없었을 거야. 애써 괜찮은 척 내려놓은 찻잔을 들었다. 어째 목이 탔다.
“걱정할 것 없다고 머리로는 알면서도 왠지 걱정해버리고 싶단 말이지~ 친구란 아무래도 간섭해버리고 싶은 자리인 모양이야.”
슬프게 하려는 게 아니었다는 말도 그렇다. 당신의 본의가 아니어도 속상해지고 마는 건 평온한 얼굴 너머로 어딘지 모르게 당신이 고독해 보인 탓이다.
언젠가 했던 말을 되풀이해보자. 화랑지방은 애향심 깊은 주민들이 많았다. 푸실마을의 도화무늬 기와집이 그랬고 늘봄의 서가가 그러했다. 그런데 애향심이라는 것은 당최 무엇으로 나타내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일까. 긴 역사? 가문의 정체성? 마을의 인정? 애정은 그런 것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님을 이 자리에 마주하고 있는 두 사람이 잘 안다. 그 점에서 능란은 눈앞의 이가 화랑지방과 자신의 가문, 그리고 기사라는 것에 대단한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몰라도 알 수 있었다. 그와 그의 가문은 존재만으로 화랑의 자랑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그가 지닌 애정이란, 또 애착이란, 동경이란, 겪은 적 없는 것을 향한 막연한 향수란 것은 그 가치가 아까울 만큼 둑에 막힌 물줄기처럼 꽉 틀어막혀 있기도 하였다. 원석이 빛을 보지 못하고 길바닥을 구른다면 그것을 알아보는 자가 탄식해버려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않던가. 존재만으로 자랑이어야 마땅하건만 기억되지 못한다면 그가 말했듯 그 자리에 있되 보이지 않는 유령과 다르지 않다. 잊혀짐 또한 죽음이라면 이 죽음은 당신이 말하던 명예로운 죽음과 척을 지는 형태일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당신 자신이 잊혀질 것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선인들을 기억하려고 하나.
이야기가 이어진다. 해묵은 창고의 문을 열 듯 까마득하게 펼쳐지는 이야기 속으로 여자는 거침없이 끼어들었다. 그와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향했다. 곰팡이 핀 냄새도 꽤 좋아하거든. 그리고 가끔은, 이야기라는 것도 지금처럼 바깥 공기도 쐬게 해줘야지. 새벽 공기를 닮은 목소리가 듣기 좋게 흐른다. 강물을 역행하는 연어처럼 넘실거리는 파도를 타고 오르면 길 위로 그를 닮은 듯 또 닮지 않은 듯, 수많은 기사들의 이야기가 떠내려왔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동화와는 궤가 다른 해피엔딩. 하나같이 숭고하고 이기적이던 사람들. 그래서 행복해지는 이는 누구인가. 부외자의 눈으로는 말이다, 명예로운 죽음을 두고 해피엔딩이라고 하면 반발도 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당최 기사란 무엇이고, 또 진정한 기사도란 무엇으로 결정되는지. 제가 너무 건방지게 구는가? 멋대로 떠드는 외부인의 반발을 역경 삼아 강해져라, 진정한 기사.
“기사로서 명예롭게 죽길 바라는 건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슬프니까 나는 그중에서 가정을 위해 기사를 포기한 기사님 이야기를 좋다고 할래.”
결국 그 사람도 기사로 기억되었기 때문에 라한 씨의 이야기 속에 등장한 거잖아. 이런 기사도 기사였던 거니까. 코멘트를 달아가며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즐겁게 귀기울였다. 막힘없이 술술 이야기해오는 모습을 보며 어린 시절의 그를 상상하기도 했다. 잠자리에 누워 몇 번이나 이런 이야기를 들어온 걸까. 꿈에서까지 기사를 꾸었을까. 그건 분명 귀여웠을 텐데.
“그래서…… 저의 꿈은 결코 혼자만의 것이 아니랍니다.”
능란의 어깨에 얹어지던 죽통밥의 개수는 셀 수 있는데 그의 어깨에 올라앉은 사람들의 꿈은 셀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들을 모두 짊어지고 기사를 이루고 싶다니 보기보다 훨씬 욕심쟁이인 모양이다. 평온한 얼굴로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이가 아닌가. 한 줄 파도를 넘어서 차라리 그 본인이 대양이 되겠다는 선언만 같이 들린다. 그릇이 크다, 커도 너무 커.
“그러니까─ 라한 씨의 바람이라는 것은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기사들의 이야기가 끊기지 않도록, 라한 씨 본인도 기사가 되어서 과거로부터 현재를 잇는…… 그리고 다시 미래의 기사에게로 넘겨주는 다리가 되는 걸까?이런, 자꾸 라한 씨의 마음을 해석하려고 하네.”
미안, 미안. 머쓱하게 사과하며 두 다리를 모았다. 무릎 위에 턱을 얹고 그를 곰곰이 응시했다. 그래, 당신은 분명 여기에 있다. 내가 보고 있다.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이해하고 싶어서 그래. 나는 공주님 같은 건 분명 체질에 안 맞겠지만, 기사님이 지켜줘야 할 공주가 되진 못하겠지만─아, 공주 대신 성주는 되나? 으핫─, 당신을 계속 보고 있고 싶으니까. 음, 왜. 유령들이 이승에 남아 있는 이유는 못다 한 미련 때문이어서 그렇다잖아.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당신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당신도 알아주면…… 내가 당신을 보는 것처럼 당신이 날 보면서 조금은, 여기 있다는 기분이 들려나 했거든.”
어렵네에, 말꼬리를 늘리며 식은 찻잔을 다시 채웠다. 그야 스무 해가 넘도록 타인으로 지내온 삶이 쉬울 리야 없지만 제가 어려워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모처럼 이런 이야기까지 들었으니 무어라도 그를 위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바람을 이루어주고 싶다는 어쭙잖은 소망이다.
“뭔가 멋진 이야기를 들어버려서 그런가 봐. 라한 씨처럼 큰 뜻을 가진 사람을 보면 꿈을 가진 사람들은 이렇게 대단하구나, 감탄이 들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뭐 변변찮은 것이겠지만 그래도, 당신의 꿈을 거들 수 있도록 뭐든 도와줄 게 있다면 말해줘.”
말로 그치는 건 능란의 체질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손뼉을 짝, 치며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입꼬리가 귀에 걸린다.
“예를 들자면 말야. 라한 씨가 멋진 기사가 되면 될수록 당신의 그 무용담을 화랑지방 방방곡곡에 알리는 거야. 그렇게 모두가, 지금의 당신을 알아줄 수 있도록. 어때, 소문이라면 좀 자신 있는데.”
같은 기사끼리, 기사 좋다는 게 뭐겠어~
이후 돈독한 전우가 되었습니다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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