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스터 : 피치럼블

038) 10.30. 자존심

천가유 2023. 12. 27. 21:10

ㅡ나나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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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하게 불어오는 모래바람이 한차례 대지를 휩쓸고 지나가면, 그 위를 오간 수많은 존재가, 또 흔적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지워지는 일이 순식간이었다. 사막이란 곳이 그랬다. 바다와는 다른 의미로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하고 압도적인 자연이었다. 우리가 발 디딘 이 아래엔 또 얼마나 많은 잊혀진 것들이 잠들어 있을까.

사막을 걸을 때면 그래서 늘, 무덤 위를 걷는단 생각이 들곤 했다. 가끔은 그 사실에 숙연한 묵념을 보냈고 가끔은 아찔한 공포를 느꼈다. 경이롭기도 했다. 무엇이든간에 만만치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바위는 차라리 좋단 말이지. 바다 위에 섬이 있다면 사막에는 바위가 있지. 함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한 좋은 포석이야.”

트레이너의 느긋한 목소리에 꼬시레는 불만스럽게 바위로 된 바닥을 긁었다. 늪도, 물도 없는 곳. 역시 속은 게 아닐까? 분명 더 넓고 재미난 곳을 보여준다고 한 것 같은데 정작 따라온 뒤부터는 최악이었다. 이런 곳은 특히나 먼저 자리 잡은 포식자가 있어 제 본능 같은 청소부 일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어째서일까. 데려온 주제에 트레이너는 묘하게 저에게 거리두기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먼저 트레이너에게 치근거릴 만한 사교성도 갖지 않은 꼬시레는 그저 이 모든 환경이 불만스럽기만 했다. 우울하다. 있어야 할 곳을 잘못 찾은 기분이었다.

평소라면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꼬시레를 돌봤을 빼미스로우는 그러나 드물게, 최근 자신의 역할을 팽개치고 있었다. 모래톱길에 들어온 뒤부터 나나는 내내 심기가 불편했다. 잘못 디디면 끝도 없는 모래지옥으로 빠진다든지 풀 한 포기, 물 한 모금 보기 힘들다든지 한 문제가 아니었다. 불만은 바로 저것이다. 제 트레이너가 아무것도 모르고 헤헤 웃으며 일광욕을 즐기는 넙데데한 바위. 바위, 바위!

바위 타입에 비행 타입인 자신이 약하다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나를 무엇보다 괴롭게 하는 건 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마지막까지 남겨졌다는 부분이다. 그는 며칠째 모아체육관에서의 배틀을 곱씹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엔 이기기 힘들 것 같아. 그래도 우리,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오자.

체육관에 임하기 전 트레이너가 포켓몬들을 모아놓고 한 이야기였다. 나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꽃가람숲에서 나몰빼미로 긴 세월 보내는 동안 그라고 천적에게 쫓긴 경험이 없지 않았다. 수도 없이 도망치고, 패배하고, 구르고 깨지고…… 하지만 지는 것이, 약한 것이 곧 의젓한 포켓몬의 자존심을 뭉개는 일이 되진 않았다.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살아남았어. 그럼 된 거야.

보아하니 자신이 이 파티에 합류하기 전, ‘패배란 단어가 트레이너의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하는 일이 있기도 했던 모양이지만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않는 것도 의젓한 가장의 특성이었다. 중요한 건 현재다. 지금 제 트레이너는 아주 잘하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그간, 습지를 다니면서 포식자의 위치에서 활약을 보인 빼미스로우는 이 정도가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아아, 그래. 저들이 내 약점을 노린다면 나 또한 최선을 다해 버둥거려주지.

──하지만 이건 아니지!

차례가 아닌데 강제로 끌려 나왔다. 배배가 쓰러지고 위위가 쓰러졌다. 그사이 나나는 필드 위에 방치되었다. 거기 서 있는 게 위협조차 되지 않을 존재. 그게 짐리더가 나나에게 내린 평가였다. 차라리 무시무시하게 쏟아지는 바위 공격에 엉망진창으로 당해 쓰러졌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내가 여기 있는데, 선 채로 무시를 당한다고?

……으응? 나나, 왜 그래?”

억울함과 분함이 포켓몬을 성장시키는 마이너스적인 에너지를 창출했다.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기분에 몸을 맡긴 빼미스로우는 뽐내기 위해 구부렸던 머리깃을 꼿꼿하게 세우며 어떤 모래바람에도, 바위에도 꺾이지 않을 새 외투를 단장했다. 네가 나를 무시한다면 무시하지 못할 존재감이 되어주고야 말겠다는 모크나이퍼로의 성장이었다.

그리고 눈부신 빛에 휩싸이는 포켓몬을, 바로 옆에서 전부 지켜보는 포켓몬이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그 성장의 빛은 찬란하고 영롱해 어쩐지 낯선 욕심이 났다.


아무래도 나나에겐 신선한 경험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