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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의존하는 이는 누구니? 디뉴엘.

: 장 디뉴엘 닮은 색, 전혀 다른 온도, 아니 어쩌면 닮은 온도이면서 그러나 결국 맞지 않는 온도의 두 눈이 시선을 부딪친다. 너와는 어울리면 어울릴수록 서로에게 상처만을 남기는 것 같았다. 화상, 예상, 그렇게 서로를 소모시키기만 한다.그럼에도 부딪친다. 너를 납득시키고 굴복시키는 것이 내겐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너에게 증명해야 했다. 너만이 아닌 수많은 가이드에게, 수많은 인류에게.네가 굽혀온 만큼 곧게 허리를 편다. 두 손을 허리에 얹고 가슴을 내민다. 무방비하다고 해도 좋은 자신에 찬 자세였다. 어떤 시선 앞에서도 나는 당당했다.완전무결의 거미, 아인델 아라크네다.“인류를 위해 일한다 해도 그것은 내 선택이란다. 내가 가진 능력을,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 다만 그 일이 숭고하기 때문에..

소멸, 탄생 2019.05.15

09. 나는 조용한 것이 좋아.

: 미션 로그 3 적절한 시기라는 것이 있다. 무르익은 때라는 것이 있다. 과실이 가장 맛있게 익은 순간, 흔들리던 수면이 고요하게 멎는 순간, 사냥감이 과녁에 들어오길 숨죽이고 기다리다가 명중시키고 마는 순간, 그 시기란 너무 조급해서도 안 되고 늦어서도 안 된다. 그렇기에 어려웠다. 완벽한 타이밍을 잡기란.어려운 것이지만 아인델의 특기이기도 했다. 서두르지 않고 가장 좋은 타이밍을 맞추기.그녀는 스스로 급박한 상황, 1분 1초를 겨루는 상황에 맞지 않음을 안다. 예를 들자면 어제의 훈련과 같은. 맞지 않다고 못한단 뜻은 아니다. 언제나 상황이 제 원하는 대로 돌아가주지 않는단 것쯤은 알았다. 그렇지만 역시, 이왕 움직일 거라면 베스트를 취하고 싶었다.그 점에서 오늘의 훈련은 반가운 것이다.“시끄럽구나..

소멸, 탄생 2019.05.15

08. 잘했어, 챙.

: 챙 후이위 대화가 유독 길어지고 있었다. 대화 사이의 침묵도 그만큼 길었다. 나는 너를 기다렸다.하나의 주제의 꼬리를 물고 다시 그 다음 꼬리를 물고, 너와의 대화는 내게도 유익한 기억이었다. 싫지 않았다. 아니, 좋아하는 쪽에 속하였지. 내 말은 곧잘 사람들의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오해를 사지 않고 말하는 법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타인의 오해 따위로 흔들리지 않는다. 정말 오해였을까? 다만 오만일지도 몰랐다.너는 쉽게 도망쳤다.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굴다가 사람 손을 가리는 강아지마냥 쪼르르 멀어지는 일이 순식간이었다. 그런 네가 나와 대화를 할 때는 꾹 참고 한 문장, 한 단어, 마침표까지 더듬거리며 입술을 움직이는 일이 퍽 기특했다.「잘했어, 후이위.」네 노력에 나는 칭찬을 ..

소멸, 탄생 2019.05.15

07. 너와 나는 같은 극이구나, 잉그렘.

: 애쉬 잉그렘 “완전한 거절이라는 표현은, 네가 나를 완벽하게 원할 때에나 어울리는 표현이지.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로 꾀려 하면 곤란해.”가느다란 실 위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러 떨림을 한곳으로 모은다. 그렇게 고이는 소리는 선율이라는 이름이 붙곤 했다. 아인델의 목소리가 그러했다. 우아하게 흘러나오는 라의 음계. 입술을 당겨 올리며 귓가로 속살이는 목소리에게 시선을 옮긴다. 오만한 시선이 머리끝부터 찬찬히 떨어져 내리다 이윽고 두 손가락으로 상대의 뺨을 짚었다. 온기는 그녀의 다정함을 닮아 있었다.너는 다정하고 사려 깊지, 잉그렘. 네 꿈꾸는 듯한 목소리는 듣는 이까지도 꿈속으로 당겨들일 것만 같단다. 하지만,「기다려주겠어요? 어쩌면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해질 수도 있겠네요.」“내가 바라는 것은 온전히 ..

소멸, 탄생 2019.05.15

06. 내게 시간을 내주겠니, 다이아나.

: 다이아나 리 「라~ 라, 라~」아주 어릴 적의 기억이다. 부모님의 손을 맞잡고 팝페라 콘서트를 간 적이 있다. 그 날의 기억은 벌써 10년 가까이 지난, 무척이나 옛된 기억이지만 그럼에도 색 바랜 사진을 책 사이에 소중히 끼워넣듯 아끼는 추억이었다.넓은 오페라 하우스를 가득 채우던 밀도 높은 목소리, 아름답고 따스한 소리가 공간을 채워나가 마치 편안한 물속에 잠긴 듯 했다. 노래는 그저 아름답거나 편안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때론 격정적이었고 정열적이었고 슬프거나 애틋하고 목소리가 고조될 때마다 어린 마음 또한 하늘을 찌를 듯 고조되어 가수가 자아내는 선율에 일희일비를 반복했다.아름답고 굉장한 사람. 루이스 재프먼이란 인물을 처음 알게 된 아인델의 감상이었다.그리고 그곳에서 아인델은 또 한 사람, ..

소멸, 탄생 2019.05.15

05. 하지만 지켜냈지.

: 미션 로그 2 핑-퐁.전자음과 함께 흰 격자무늬로 채워져 있던 공간이 발아래서부터 바뀐다. 가상 현실 홀로그램으로 환경이 뒤바뀌는 것이다. 머리끝까지 공간이 위기 상황으로 채워지면 아인델은 곧장 소리, 냄새, 눈에 의지해 현재를 파악하였다.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대처할 수 있도록, 이라는 이유로 늘 상황이 시작하기 전까지 사전 정보는 받을 수 없다. 그러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가장 중요하고 우선시 할 일이지만, 이번에는 유달리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10… 9… 8……, 카운트다운 소리와 함께 아인델은 민간인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폭탄을 해체하는 건 당연히 무리, 벽에 붙은 폭탄을 무리해서 떼어내는 것도 지금 상황에선 도박이다.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것은 민간인의 안전. 그렇..

소멸, 탄생 2019.05.15

04.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구나, 니케.

: 니케 실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 기분이다.바깥이 아닌 안에서부터 통증이 파도쳤다. 갑작스레 덮친 통증에 무릎이 꺾일 뻔했다. 바로 옆을 따라 걷던 이가 손을 뻗었다. 그 손길에서 약간의 머뭇거림을 읽었다. 훈련장에 들어오기 전 제가 남긴 말 때문일 것이다.「부디 네 간섭은 최소한으로 해주겠니? 나는 가이딩 없이 견뎌낼 거란다.」「그렇게 할게.」이 상황에서도 아인델은 조금 안심했다. 니케는 멋대로 굴지 않을 것이다. 제가 센티넬의 특별한 무어라도 되는 양.센티넬을 구할 수 있는 건 가이드뿐. 센티넬에게 가이드란 없어선 안 될 존재. 가이드는 센티넬의 빛. ……누가 그렇게 정한 걸까. 내밀어진 손을 부드럽게 일어낸 뒤 무릎을 손바닥으로 꾹 눌러 스스로 딛고 일어난다. 식은땀 한 줄기가 뺨을 타고 흘렀지만..

소멸, 탄생 2019.05.15

03. 아인델, 아직도 미숙하구나.

: 미션 로그 1 아인델의 하루는 규칙적이다. 취침 시간, 기상 시간, 오전 일과, 오후 일과. 그 안의 사소한 내용들은 조금씩 바뀌기도 하지만 큰 틀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아카데미에서 지낸지 1년, 아인델의 오전 일과는 늘 훈련이다. 때로는 자율 훈련, 때로는 아카데미의 과제 수행, 종종 시간이 맞는 가이드가 있다면 손발을 맞추기도 한다. 마지막 일정은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공적인 일에 사적인 감정을 넣을 만큼, ──즉 가이딩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여 아예 가이드를 멀리하고 가이딩에 무지한 채로 있을 만큼 아인델은 어리지 않다.사색을 지우고 홀로그램 앞에 선다. 이번 크리쳐는 마치 까맣게 타 죽은 시체와 닮아 있었다. 그러나 피부 조직이 전부 타 건드리면 바스라질 듯 연약해 보이진 않았다. 그보다는 ..

소멸, 탄생 2019.05.15

02. 너의 말로 나를 움직여봐, 후이위.

: 챙 후이위 고슴도치 같던 아이의 모습을 기억한다. 아카데미에 들어오고 난 뒤 아인델은 곧잘 검게 웅크린 인영을 보았다. 챙 후이위. 삐죽삐죽 짧게 뻗친 머리가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이 두려워 가시를 세우던 제 모양새와 잘 어울린다 생각했다.겁 많고 경계심 많은, 그러면서도 사람을 싫어하진 않던 아이였다. 힐끔힐끔 사람들이 오가는 걸 살폈고 때론 자기가 먼저 입을 열기도 했다. 그러다 제가 낸 소리에 화들짝 놀라기라도 한 것처럼 마지막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애매모호하게 말꼬리를 늘렸다.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어째서 말을 끝까지 하지 않아?아인델은 자신의 실력에는 자기객관화가 잘 되어 있지만 태도에는 그렇지 못했다. 제 말투가 고압적이라거나 추궁하는 것 같단 자각이 없이 무구하게, 그만큼 또렷하고 깨끗한..

소멸, 탄생 2019.05.15

01. 제법 성공적이었어, 오스트레아투스.

: 사비아 오스트레아투스 「좋아」, 좋은 아침의 줄임말.사람들은 때때로 효율적인 듯 의미 없는 일을 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억지를 부리기도 한다. 별 차이도 없는 네 글자를 두 글자로 줄이거나, 정오를 지난 시간을 두고 아침이라고 고집을 부리거나.“그치만 좋오는 이상하잖아요~”“좋은 오후란 표현도 있지 않니.”아인델은 상당히 자기중심적이고 짐짓 옳은 건 저뿐이라는 듯 대단한 체 굴기도 잘 하지만 인간사회의 규율과 범주를 충실히 지키는 편에 속했다. 다시 말해 아이들 사회 속에 녹아들기 위해 비효율적이고 무의미한 일에 맞추거나 억지를 따라주거나. ───그다지 표는 나지 않더라도.그렇지만 사비아 오스트레아투스의 말은 정말이지 어떻게 읽어내야 할지 어려웠다.“은근슬쩍 아인델에게 좋아~라고 하고 싶었거든요.”네..

소멸, 탄생 2019.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