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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다만 우리 존재가 불행했을 뿐이야.

: 챙 후이위 * * *어둔 밤이었다. 별도 빛나지 않는 밤인 것만 같았다. 세상이 고요했다. 이곳은 내내 고요했지. 침묵이 불안을 부추기고 마음을 술렁이게 할 만큼. 만들어진 고요였기에 더 불안했는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소리 내는 것들은 언젠가 잡아먹힌다. 우리는 어떤 거대한 포식자의 목구멍 안이었다.「저… 아직 인간인가요?」기분 나쁜 침묵 속에서 네 목소리가 닿았다. 불안하고 흔들리는. 괜찮은 척조차 할 수 없이 겁을 집어먹었던 목소리.「챙. 내가 네 손을 잡으러 가도 되겠니? 참을 수 있겠어?」네 목소리는 우리에게 계속 닿았는데. 내 말은 네게 닿았을지 모르겠다. 할 수 있다면 다가가 네 손을 잡고 싶었다. 너는 상냥하고 겁이 많으면서도 잘 참을 줄 아는 아이니까. 손잡길 두려워하면서도 잡고 싶어 ..

소멸, 탄생 2019.05.16

29. 율릭 함메르쇼이

: 율릭 함메르쇼이 “나는 너를 쏠 거야, 이델.” 만일 내가 광기에 젖어,내가 나로 있을 수 없게 된다면.그 때는, 네가 쏘렴.네 손으로 해줘. 상처입어야 한다면.하지만 그 전에 한 번만 더 날 믿어달라고,욕심을 부려도 될까. *부러 입에 올리지 않아도 알고 있던 사실이다.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그게 내가 아는 율릭 함메르쇼이란 사람인걸. 그렇지만 그 말이 네게 잔인할 것 또한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네가 그 말을 하지 않길 바랐다. 그 말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이 너일까 걱정이었다.“율. 나는 너를 상처주고 싶지 않았어.”“하지만 네게 그 말을 하게 함으로써, 결국 상처를 주고 말았구나.”네가 늘 내 곁에서 많은 것을 감내하고 희생하고 나를 위함으로써 네 여러 가지 것들을 놓는 걸 모르지 않..

소멸, 탄생 2019.05.16

28. 실로 오만한 여왕이었다.

: 개인 로그 「아, 그 말로만 듣던 에인헤리인가?」부츠 굽이 부드럽게 바닥을 딛고 아무도 밟은 적 없는 길의 가장 앞을 선다.「에인헤리는 괴물인 센티넬을 군인으로 만든 곳이라지?」은색의 휘장이 바람에 펄럭였다. 따라 백은발 또한 실타래처럼 살랑거렸다.「군인은 무슨, 정확히는 무기가 아니겠어?」희고 작은 몸이 선두를 화려하게 장식했다.「하긴, 저렇게라도 관리를 해줘야 안심할 수 있지.」시선이 꽂혔다. 말이 꽂혔다. 그럴수록 가슴을 폈다.「날뛰지 않게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네.」그리하여 제 어깨 너머로는 누구도 상처 입지 않도록.「──차라리 전부 죽이고 해체하는 게 낫지 않나?」또 하나, 무형의 거미줄을 펼쳤다. 레이피어를 뽑아들고 바닥에 하나의 선을 그었다. 경계선을 넘어 그 선에 검을 꽂아 넣고 섰..

소멸, 탄생 2019.05.15

27. 무제

: 율릭 함메르쇼이 *네가 내게 많은 것을 양보하고 있는 걸 알고 있었어, 율.하지만 나는 그게 네 양보나 너그러움이나 ‘이델’을 향한 존중이 아닌 센티넬과 가이드 사이의 당연한 관계이길 바랐어.우리가 동등한 인간이길 바랐어. *「이건 명령이야.」어째서 모두들 나를 꺾으려 드는 걸까. 어째서 나의 본질이란 내 존재의 다리를 꺾고 내게 한계를 부여해 옭아매려는 걸까. 어째서 나의 존재는,그렇게 무너진 나는 정말로 나일까. 더 이상 나를 증명하지 못하게 된 나는.율. 내가 너에게 의지하고 의존하면 좋겠니? 네 말을 충실히 따르고 네 통제 아래 움직이고, 모든 것을 네게 맡긴 채 네 손으로 빚어지고 피어나, 온전히 너의 것이 되길. 너는 그것을 바라니? *광기에 잠식되는 순간을 싫어해. 어떤 절대적인 힘에 의..

소멸, 탄생 2019.05.15

26. 어떻게 그게 너의 책임이니.

→ 여기서부터 성장 후 에인헤리 로그 : 애쉬 잉그렘 너만의 책임이 되니.「불신의 대상은 챙이 아니에요, 저 자신이지. 제가… 또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할까봐. 그게 무서운 거예요.」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낌을 흘리는 여자가 있다.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가 짓이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와 흩어지는 게 꼭 그녀의 능력 자체를 보는 것 같았다. Dust. 덧없는 것. 이능력이란 어쩌면 그 사람의 본질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만든 것이 아닐까. 그만큼 네 능력이 네게 잘 어울린다. 지독하게도.서로 다른 경험이 하나의 경험으로 겹쳐진다. 같은 장소에 있었다. 닮은 일이 벌어졌고 결과는 제법 달랐지만 결론은 같았다. 센티넬과 가이드의 견고했던 유대가 한 번 끊어질 듯 휘청거렸던 사건이었다.“그게 어째서 너의 ..

소멸, 탄생 2019.05.15

25. 겨울, 고치

: 개인 로그 *파삭,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던, 그러나 존재감만은 무엇과도 빗댈 수 없이 강하던 그것이 부서졌다. 부서져 산산이 흩어지는 감각이 선명했다. 이번에도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우습게도 한껏 당겨진 현이 끊어지던 제 소리보다도 머리 위의 소리에 귀를 집중하고 말았다.멀리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대꾸하지 못한 채 아인델은 그 자리에 무너졌다. 서 있을 힘이 없었다. 온몸의 힘줄이 모두 끊어진 듯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옆구리가 화끈거리고 뜨거웠다. 누군가 제 옆구리에 불을 놓은 것만 같았다. 아주 뜨겁고 또 무척이나 뜨거워서 그대로 옆구리부터 불에 타 재가 될 것 같았다. 동시에 몹시 추웠다. 제 안의 모든 뜨거운 것들이 옆구리에 난 구멍을 통해 울컥울컥 흘러나가고 있었다..

소멸, 탄생 2019.05.15

24. 가을, 침묵.

: 개인 로그 ──러스트 아스테반이 피격 당했다.목숨에 지장이 올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하필 어깨의 신경을 건드리고 지나가는 바람에 이후 재활을 하더라도 오른팔을 자유롭게 쓰긴 어려울 거란 말을 들었다.어차피 재선에 실패한 상태였다. 이대로 일선에서 물러나란 게 그를 둘러싼 진보당의 의견이었다. 이미 끝난 줄이라 했다.딸을 사랑하는 자애로운 아버지. 모든 센티넬을 제 자식처럼 여기는 너그러운 에스테반.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모두를 굽어 살피려 하는 시대의 참 지도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인 겸손한 참정자.수많은 수식어와 이미지가 순식간에 비겁자, 사기꾼, 딸만 아끼는 이기적인 기만자가 되었다. 제대 비리가 터지면서 예고된 몰락이었다. 러스트 에스테반은 피격을 이유로 정계 은퇴를 선언했고 ..

소멸, 탄생 2019.05.15

23. 여름, 추락

: 개인 로그 「조금만 더 참으렴, 이델. 곧 다 잘 될 거야.」그 편지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어느 무더운 여름이었다. 찌는 듯한 여름, 과거 지구 사람들은 콘크리트가 녹아내린다고 표현하였던가. 아인델은 더위에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 해 여름은 유난히 덥고 습했다. 가만히 포장된 지면을 보고 있으면 열로 인해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에 매끄러운 표면이 일그러질 것만 같고 그랬다.그 여름은 딱 그랬다. 모든 풍경이 일그러지듯 휘어졌다.“아인델 아스테반 준위. 내달 제대다.”“네?”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설명을 요구하는 말에 눈앞의 상급자는 더 설명해주기도 귀찮다는 얼굴로 축객령을 내렸다.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은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하나였다.“아스테반은 참 잘났군.”그는 예전부터 그녀의 ‘아라크네’..

소멸, 탄생 2019.05.15

22. 봄, 선율

→ 여기서부터 안식일 로그 : 개인 로그 ─이거 어때, 이델?─마음에 들어.곡선이 예쁜 잔이었다. 흠 잡을 곳 없는 하얀 커피잔. 받침과 스푼을 세트로 넣었다. 쇼핑 카트에 들어간 상자를 보며 아인델은 조금 들뜬 자신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이제까지 무언가를 욕심내거나 원해본 기억이 아인델에겐 극히 드물었다. 무욕無慾이란 뜻이 아니다. 특별히 간절히 원하거나 욕심내지 않아도 손에 들어오지 않는 게 없었다. 무언가 부족하다고, 원한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늘 모든 것이 손닿는 곳에 있었다. 아인델 에스테반의 삶은 이제껏 그러했다. 그녀가 보다 숭고한 가치에 눈을 돌리고 무형의 것을 욕심내게 된 것에는 이런 성장 배경도 있었을 것이다.그렇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모든 것이 시작하는 계절, 텅 빈 방에서부터 ..

소멸, 탄생 2019.05.15

21. 아름다운 것은

: 율릭 함메르쇼이 ──아름다운 능력이었다.네 손은 언제나 아름다운 것을 만들었다. 네가 연주하는 선율이 그랬고, 네 손에 피어오르는 결정이 그랬다. 너란 사람의 미의식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네가 피어내는 결정을 좋아했다.네 능력을 볼 일은 굉장히 많았다. 다른 파트너와 페어를 이루는 특수 미션에서, 매일매일 이어지던 가이드의 단독 미션에서, 일상에서까지도.정작 내게서 본 기억은 없다. 내게로 피어오르던 투명하게 반짝이던 결정은 아주 작았고 금세 부서졌다. 그보다는 네 손의 온기를 기억하는 일이 더 잦았지.그게 네 배려임을 알고 있었다. 내 앞에서 필사적으로 ‘내가 아는 율릭 함메르쇼이’로 남으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네가 ‘가이드 율릭 함메르쇼이’로서 어떻게 지내는지도 알고 있었다.「너는 달라,..

소멸, 탄생 2019.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