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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하나도 되지 않았어.

: 장 디뉴엘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그것이 어떤 용도이든 어떤 가치가 있든 상관없이 그것은 ‘그것’이라는 존재만으로 의미를 갖는다.인간이 그러하다. 인간에게는 어떤 가치를 매기지 않더라도 어떤 쓰임을 따지지 않더라도 인간이라는 것만으로 존중받아 마땅하고 존재할 의의가 생긴다.센티넬의 본질이 위험하다 하여도, 통제되어 마땅한 시한폭탄과 괴물 취급을 받더라도 센티넬 또한 인간이라면, 그 존재만으로 센티넬에게 부여된 본질을 앞서 존중받아야 했다.우리를 존중해주렴. 인정하고 받아들이렴. 본질만이 존재를 증명한다. 존재란 그 본질 앞에서 벗어날 수 없다. ──라고 네가 정면으로 말했다.「의존해야지.」「센티넬이라면 가이드에게 의존해야지. 가이드는 센티넬을 통제하고.」 센티넬을 통제함으로써 존재를 증명한다. 그것이..

소멸, 탄생 2019.05.15

19. 비극은 늘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시작된다.

: 미션 로그 7 아인델은 비위가 강하다.아인델은 비위가 좋지 않다.일견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두 문장은 공존할 수 있었다. 비위가 좋진 않지만 그 불쾌를 억누를 만큼 강했다.그러니까 즉, 촉수를 앞에 두고 질색하는 표정을 지을지언정 훈련을 위해 그 자리를 견뎌낼 수 있단 뜻이었다.“하지만 정말, 시각적으로 좋지 않구나.”크리쳐와 대치중인 상대가 센티넬이라 다행이었다. 민간인이라면 여유 부릴 새도 없이 달려가 구조했겠지만 센티넬이라면 잠시 스스로의 비위를 점검하고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정도는 챙겨도 좋았다.“저것은 어떤 욕망이 있었기에 저런 기분 나쁜 모습이 되었을까.”그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녹색의 미끌거리는 촉수 몇 가닥이 그녀를 향해 쏘아졌다. 아인델은 촉수를 자세히 보지 않으려 노..

소멸, 탄생 2019.05.15

18. 더스트

: 애쉬 잉그렘 너와의 페어는 내 기억에 제법 오래 남을 거란다. 네 덕에 나도 조금은 반성을 했거든, 잉그렘. 응시해오는 시선과 시선을 맞추며 은빛으로 반짝이던 가루가 휘감기던, 잠시나마 제가 서 있던 자리가 전장임을 잊고 꿈속에 잠기던 그 순간을 더듬는다.가이드로서의 그녀와 인간인 그녀를 분리했다. 격리라 해도 좋았다. 네 가이드 능력을 내게 쓰지 마. 그 말이 상대에게 얼마나 모멸이 될지 모르지 않았다.이제껏 함께 움직인 임시 페어의 모두가 내 말에 인상을 찌푸렸고 불쾌를 표하며 거부하거나 마지못해 승낙했다. 그리고 어떤 이도 마지막까지 제 능력을 억누른 채 나를 지켜보지 못했다. 바로 그게 가이드와 센티넬의 관계가 아닐까 나는 늘 생각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고 붙잡을 수밖에 없는. 온전한 신..

소멸, 탄생 2019.05.15

17. 우리는 서로에게 증명해보일 수밖에 없겠구나.

: 장 디뉴엘 아인델은 야만적인 행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폭력은 하나의 수단이지만 옳은 답이 되지 않는다. 폭력으로써 이뤄내는 굴복은 진짜가 될 수 없다. 상대를 굴종시킨다면 다른 수단이 되어야지.그러니 아인델은 상대의 머리에 얼음물을 끼얹고 정강이를 걷어차며 그 목에 목줄을 걸어 당기는 일이 있더라도 폭력으로써 상대를 굴복시키려 하지 않았다.설령 상대는 다르다 할지라도.장 디뉴엘은 모순된 소년이었다. 소년의 악력에 끌려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고통 앞에 두 팔을 떨어트린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그 다음은? 붉게 부어오른 뺨이, 검은 손자국을 남긴 목이 새파란 불꽃에 휘감겼지. 네가 저지른 일을 마주 보지 못하겠니. 치료는 필요 없단다. 제 말은 늘 그에게 닿지 않았다.폭력은 수단이지만 답이 되진 ..

소멸, 탄생 2019.05.15

16. 아인델 아라크네가 여러분을 보호할 것입니다.

: 미션 로그 6 가이드의 손을 잡았다. 무슨 대단한 심경의 변화가 있던 것은 아니다. 필요하다면 취할 줄 알아야 한다. 고집부리지 말고.그 생각을 따라 아주 조금 도전을 해보았다.맑아진 컨디션으로 아인델은 쉴 생각 않고 곧장 개인 미션룸으로 향하였다. 오늘의 미션 내용은 사전에 고지 받은 상태였다. 가이드에게만 그런 미션이 주어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 손가락을 마주 깍지 껴 이리저리 잘 풀어주고 아인델은 홀로그램의 가동음과 함께 천천히 또 다른 현실 속에서 눈을 떴다.이것은 현실이었다. 언제든 어디서든 벌어질 수 있는 현실. 그러나 동시에 조작되고 의도된 것이기도 했다.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이 시험의 목적은 무엇일까. 모든 일에는 함유가 있기 마련이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명령에 복종하는 모습을 ..

소멸, 탄생 2019.05.15

15. 우리는 욕망을 가진 존재야, 네가 그렇고 내가 그렇지.

: 독백로그 밤공기가 미지근했다. 비가 오려는 걸까. 조금 습한 것 같기도 했다. 땀에 젖은 피부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차갑게 식은 그것이 끈적한 감촉을 남겼다.간질간질한 불쾌가 피부 위를 더듬어 오른다. 그 감촉이 꼭 수십 마리 거미가 제 피부를 기는 것 같았다. 두통이 일었다. 이유는 잘 알고 있었다.아인델은 한 번도 광기로 인해 먼저 가이드를 찾은 적이 없다. 그러나 가이드를 찾지 않고도 견고할 수 있던 건 그녀가 뛰어난 탓이 아니었다. 그저 이 공간이, 접촉하지 않아도 가이드의 영향력 안을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작을 뿐이다.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고 손을 잡고, 겨우 그것만으로도 아인델은 치유 받았다.참 편리하고 달콤하지. 정말 없어선 안 될 존재인 것만 같지.누군가는 그들을 충전기라고 했지. 누..

소멸, 탄생 2019.05.15

14. 내게 율은 누구보다 좋은 선택이 되겠지.

: 율릭 함메르쇼이 ───빛에 감싸인 기억이 있다.센티넬의 능력이 처음으로 발현되어 테스트를 치르러 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만을 보고 있었다. 시선에는 익숙하다. 비록 그 시선이 이제까지 받았던 우러러봄, 선망, 호의, 그 둥글던 것들과 전혀 다른 날카롭고 뾰족한, 언제든 제 몸을 찔러들고자 하는 것들이라 하더라도 아인델은 시선 앞에서 굽히는 법이 없었다.굽힐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떳떳했다.13살 어린 나이였다. 하지만 이미 권리를 알았고 의무를 알았다. 사명감이 있었다. 센티넬의 능력은 때문에 어린 그녀에게 어쩌면 당연히 주어질 것, 반길 것이기도 했다. 이 또 하나의 특별한 힘으로 주어진 의무를 다할 것이다.이제껏 한 번도 남에게 굽힌 적이 없었다. 떳떳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그 무릎..

소멸, 탄생 2019.05.15

13. 배움은 언제나 무용한 법이 없어.

: 미션 로그 5 지-잉.귀에 익은 전자음과 함께 서 있는 공간이 바뀐다. 제 발밑에는 두 자루의 권총, 눈앞에는 딱 인간 크기의 크리쳐. 의도된 것이다. 미션 내용은 사전에 들었다. 아인델은 곧장 발끝으로 권총을 차올려 손에 쥐었다.탄창 부분을 손바닥으로 받치고 한쪽 무릎을 앞으로 하여 무게 중심을 잡는다. 크리쳐는 아직까지 적의를 보이지 않고 어리둥절하게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 또한 의도된 것이다.총을 쏘는 법을 배운 적이 있다. 호신술의 연장이었다. 센티넬이 되기 전에도 그녀는 아스테반의 딸이었고 경호원이 늘 곁에 있다 해도 위급 시에 제 몸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배웠다. 총을 가르치면서도 아버지는 그녀의 은발을 쓰다듬으며 다정히 말씀해주셨지. 「네게 이 배움이 무용한 것이 되게 하겠다.」 고...

소멸, 탄생 2019.05.15

12. 네 저울에 나를 올려보렴.

: 챙 후이위 너는 몇 번이나 두려움을 말한다. 그러나 나는 네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다 이해할 수 없었다. 표면적인 것까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너머에 네가 어떤 경험을 하고 무엇을 억누르고 있는지까진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네게 답을 주는 건 내 역할이 아니다.네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선택하고 결정하는 건 온전히 너의 몫이다. 네 존재에 대한 책임이자 권리였다. 하지만,네 이능력을 떠올렸다. 폭식(暴食). 무엇이든 네 손으로 집어삼킬 것만 같은 새까만 탐욕. 네게도 분명 욕망이 있다. 많은 욕망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욕심내야 좋을까. 너는 그 방법을 잘 모른다고 하였지만 실은 알기를 두려워할 뿐이라 보았다. 선악과에 손을 뻗은 뒤 더 이상 좁은 낙원에서 살 수 없게 된 언젠가의 선조처..

소멸, 탄생 2019.05.15

11. 오늘도 내 뛰어남이 증명되었구나.

: 미션 로그 4 익숙한 시작음과 함께 서 있던 공간이 홀로그램의 가상현실로 바뀐다. 이번엔 아무것도 없는 넓은 방이었다. 아무도 없기도 했다. 이번엔 뭐지? 설마 며칠 열심히 했다고 이 방에서 정신 수양이라도 하며 보내란 것은 아닐 텐데. 그러나 정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홀로그램의 오류라기에는 공간이 해제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카메라는 변함없이 저를 기록하고 있었다.그렇다면 할 일은 하나다. 대비. 방비. 준비.큰 것이 온다. 그 하나밖에 예상할 수 없었다. 아인델은 실뜨기를 하는 기분으로 거미줄을 쳤다. 아주 촘촘하고 넓은, 무엇이든 감싸고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그물을 짰다. 보통은 제 몸보다 조금 더 큰 수준밖에 짜지 못하지만 시간이 많아서 그랬을까. 제법 커다란 거미줄은 아인델..

소멸, 탄생 2019.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