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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영웅들에게 축복과 안식을

: 추모로그 더보기 우리의 위대한 어머니 인베스에게. 오늘 당신의 자녀가 긴 안식을 위한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수고한 영웅들에게 축복이 따르길. 그들이 어머니의 은총 아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편히 쉴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잘 들어라. 내가 먼저 가도 절대 기 죽으면 안 된다.” 정말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던 건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느냐 물어볼 때 적절한 말 하나 고르지 못하더군요. 앞으로는 단원들에게 미리 유언장이라도 적어두라고 할까요. 너무 사기가 떨어지려나. 그래도, 인생에 한 번뿐이잖아요. 행운보다 귀중한 마지막으로 남길 말. 마지막까지 우리를 골 때리는 기사단이라 부르더랍니다. 기억해두세요, 남은 경들. 먼저 간 단장이 관속에서도 이마를 짚도록..

13. 동행의 끝에서

: 에덴 카데르 더보기 운명이라고 했다. 스스로 붙인 성이다. 결국 네가 운명을 따르기로 한다. 처음 네게서 그 성을 들었을 때 눈앞을 스치던 풍경이 있었다. 있을 리 없는 하얀 실이 네 목과 손을 감아 꼭두각시처럼 당기면, 새하얀 동공이 새하얀 하늘을 응시하였더라. 그곳에 낙원이 있는가 하였다. 너와 낙원으로 향하고 싶은 마음은 거짓이 아니었는데. 「결국 모든 것은 당신이 바라던 대로 이루어졌으니.」 결과를 앞에 두고 웃지 못한다. 늘 그랬다. 너를 앞에 둘 때면 매번 형언할 수 없는 기묘함에 휘감겼다. 이를 테면 내가 너를, 구원한 듯한. 타락시킨 듯한. 기묘하게도 너를 대할 때의 나는 그래, 이상했다. 주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할 만큼 삿되고 불결한 것만 같았다. 만족하느냐 묻는다면 그렇다 답하면서 ..

12. 상냥함의 기원

: 언성 더보기 까득, 하고 선명히 들려오는 소리에 무심결에 손을 내밀려 했다. 이조차도 몸에 밴 오랜 습관이다. 위선일까. 기만일까. 친절이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다정이란 무엇으로부터 나올까. 나의 상냥함이란 네 말처럼 소모되는 것일까. 글쎄, 그렇지 않다. 하얗고 푸른 구역을 코앞에 두고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네가 따라 멈추길 기다리다 가만히 시선을 맞춘다. 표정이 궁금했다. 눈을 보고 싶다고 하면 요청을 들어줄까? 7년이라는 까마득한 시간을 뛰어넘어 내내 고개 들지 못하던 어린 아이는 어느새 상대를 바로 응시하게 되었는데, 어떤 얼굴로 자랐는지 여태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더라. 네 눈이 하는 말이 듣고 싶었다. 그 밤이 참 깜깜하더랬다. 빛 없는 밤 아래서는 옷 색 따위 구분가지 않았다. ..

11. 돌아올 티타임까지

: 로블렛 H. 베리 더보기 구름이 둥글던 어느 날. 진하게 우린 아쌈. 잔의 테두리에 물방울이 맺히는 것을 보며 각설탕을 두 개. 종종 우유를 타기도 한다. 이럴 때도 흰색을 좋아하느냐 네가 짓궂게 묻는 날도 있었다. 「그런 게 아니래도요.」 하루는 얼 그레이. 베르가못을 섞어 독특한 오일향기가 은은하게 퍼지는 차는 네 장미정원에 잘 어울렸다. 다음엔 장미잎을 말려 띄워볼까. 정성들여 키운 꽃이니 만큼 어울릴 것 같았다. 실론, 잠 못 드는 밤을 위한 블렌딩. 로얄 블랜드, 우리의 자리를 빛내기에 걸맞노라 웃던 이름, 계절이 바뀌고 해를 지나는 동안 아스칼론의 단내에서, 너의 정원에서, 뤼봉의 라벤더 밭 한가운데서, 어느 날이고 변함없이 테이블 하나. 의자는 두 개. 마주 앉아 차를 나누었다. 별 대단..

10. 약속

: 카리스 라이프니츠 더보기 그의 검을 본 이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살기라곤 없는 검이다. 부정할 의지조차 없었다. 굳이 살생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 않느냐, 하지 못하느냐를 묻는다면 적어도 전자라고 답하리라. 그러나 의지가 어떻든 그의 검이 지나치게 소극적인 것은 사실이었다. 검을 드는 일에 관심이 없던 아카데미 시절, 그럼에도 검을 들어야만 했던 거대하고 흰 문의 앞. 그 때 정했다. 검을 든다면 오만하게도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들겠노라고. 날붙이에 자아가 있다면 제 마음을 비웃었을지도 모르리라. 지키는 검이고 싶었다. 굳이 죽이고 싶지 않았다. 타인의 숨을 거두고 싶지 않았다. 생과 사를 관장하는 것은 신의 영역이라 믿었다. 자아 없이 검끝을 오래도 신에게 의탁해 왔다. 그럼에도 사람을 ..

09. 희게 핀 라벤더, 먼 옛날의 대지

: 휴식기 개인로그 더보기 동구를 넘어 지상의 바다를 보렴. 하얀 꽃, 보라 꽃, 활짝 피었구나. 하이얀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향긋한 꽃향기가 실바람 타고 솔솔.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 보며 생긋. 희게 핀 라벤더, 먼 옛날의 대지. 동구를 넘어 꽃의 물결을 보렴. 포말이 이는구나. 활짝 피었어. 하이얀 이파리 깃털처럼 날리네. 향긋한 꽃향기가 실바람 타고 솔솔.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 보며 생긋. 희게 핀 라벤더, 먼 약속의 대지. 자장가 소리가 고요한 방안을 채운다. 물그릇으로 쏟아지는 빛을 통과해 벽에 물그림자가 그려졌다. 아이가 좋아하는 풍경이었다. 어서 잠들라고 그 가슴을 도닥여주고 있었으나 온종일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니 잠이 안 올만도 했다. 여자는 대신 이마에서 툭 떨어진..

08. 라벤더의 잔향

: 휴식기 개인로그 더보기 성대한 졸업식이었다. 그도 그렇겠지. 미래의 국가를 이끌어나갈 인재들의 집합이라고 환성이 자자하더랬다. 수석으로 불리운 이름을 듣고 아, 짧은 탄성과 납득을 한 뒤 그 뒤를 따랐다. 언젠가 말한 것처럼 나란했던가. 한 발짝 뒤였던가. 경애를 담아서. 한 명, 한 명, 졸업장을 받는 동안 졸업 노래가 잔잔히 울려 퍼졌다. 담담한 졸업생들과 달리 남겨지는 후배들의 얼굴에 도리어 아쉬움이 가득해 보였다. 늘 그랬다. 떠나가는 이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자연히 미소를 그리며 비에모드는 생각한다. 나의 미래, 내게 찾아올 시련. 내가 마주하게 될 나의── 제 앞에 놓인 길이 달라진 적은 없었다. 찾아오는 후배의 손에 백합을 한 송이 건넸다. La vare, 인베스의 축복이 당신을 따르길...

07. 휴식기 동안의 편지

더보기 놀라움을 안겨주는 제자에게. 라 바르. 주신의 크신 은혜가 이 편지와 함께 당신에게 깃들길. 당신이 먼저 편지를 보내다니 조금 놀랐답니다. 답장이 늦어져서 미안해요. 기다렸나요? 선물이 다른 용도로 쓰이지 않도록 자주 보내주어야 할 텐데 바뀐 환경이 생각 이상으로 바쁘더군요. 그래도 잘 지낸답니다. 걱정보다 훨씬. 졸업식이 있은지도 오래지 않았는데 어쩐지 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기분이네요. 그 사이 최고 학년이 되었겠군요. 후배들에게 상냥하고 멋진 멘토가 되어주고 있겠죠. 그렇다고 당신이 하던 것처럼, 아카데미의 규칙을 벗어나 마음 이끄는 대로 다니게 하진 말고요. 이 편지가 도착할 즈음엔 축제도 끝났겠어요. 올해 축제는 보러 가지도 못했는데, 제 몫까지 봐주었길 바라요. 음. (잉크가 유독 고..

06. 흰 나이프

: 크피르 F. 렌하르트 더보기 어째서 누군가는 부족함 없는 삶이라 칭하는 우물 안에 갇혀 있는지, 누군가는 가진 것 없는 삶 속에서 갈증에 허덕이는지, 내 심장이 이끄는 방향을 알지 못해 혼란스러운지, 바라는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는지. 어찌할 수 없이 타고나길 다르고 주어진 것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기질이 다르다. 성격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며 지극히 사소하게는 좋아하는 과목이 다르고 기상시간이 다르고 나이도 다르겠지. 우리는 이토록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럼에도 함께 가는 길을 바란다. 「기사단에서 또 볼 수 있을까요.」 그것은 또 다른 운명에 바랄 일이나. 다름 가운데 우연처럼, 또 운명처럼 아카데미에서 만나 한 페이지에 도장을 다 채우도록 시간을 나누었다. 네가 수업을 듣도록..

05. 마른 가지에 즐거움이 부어질 때

: 카리스 라이프니츠 더보기 반짝이는 샹들리에의 조명, 부드럽게 깔린 카펫, 나른하게 흐르는 음악소리에 숨어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고 사람들이 속삭인다. 오늘의 날씨나 유행하는 복식부터 시작해서 최근의 불안한 정세와 자꾸만 충돌하는 두 세력에 대한 것까지. 바깥에서 보면 휘황찬란한 동경 속의 세계이나 안을 열어보면 포장만 못한 풍경이다. 누군가는 바깥에서 구걸을 하고 배를 곪는 일이 차라리 이곳보다 낫다던가. 돌고 도는 왈츠의 행렬, 셀 수 없이 많은 다리의 일사분란한 움직임을 응시하고 있자니 현기증이 날 것도 같았다. “여기 있네, 춤은 안 추고?” 네가 말 걸어주기 전까지 완벽히 벽의 꽃으로 남을 요량이었다. 내밀어진 손을 잡자 주위가 조금 선명해졌다. 네가 가진 색이었을까. “당신이 제게 주목해준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