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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019 오늘의 일기 11월 29일

: 오드리 포트 겨울이 오기도 전에 목새마을은 일찌감치 눈이 내리기 시작했어요. 그보다 이 지역은 언제든 눈이 내리고 있어서 새삼스럽지도 않네요. 14년을 눈이 내리지 않는 지역에서 자랐는데 이사한 곳은 1년 365일 눈이 덮인 곳이라니 저도 참 중간이라는 게 없나 봐요.그렇지만 처음 즐긴 목새마을의 여름은 기분이 좋았어요. 선로의 건너편은 아직 눈이 남아 있었지만 마치 밀물과 썰물의 경계가 달라지듯 눈이 녹은 지역이 점점 더 넓어져서, 그 아래로 대신 푸석푸석한 갈색 풀들이 드러나고 머지않아 1년에 한 번, 짧은 여름동안 햇빛을 받아 푸른색을 되찾았거든요.목새마을의 여름은 꼭 기적만 같았어요. 아름답고 생기 넘치고 푸르고 시원한 계절. 처음 겪어보는 계절이었죠. 그러다가, 에취.금세 재채기가 나오는 계..

41 잼 뚜껑과 조깅화

: 타카하타 이노리 호박 파이를 먹었다.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빼빼로도 먹었지. 또 뭘 먹었더라? 아무튼 많이 먹었다. 디저트만 먹은 것도 아니다. 세 끼 식사도 충실히 했다. 요즘 세이라의 취미는 요리였고, 가정식 외에도 여러 가지 메뉴에 곧잘 도전했다. 1인분보다 2인분을 만드는 쪽이 편했다. 좋았다.결과는 당연했다.“살쪘어.”머리 위로 덤벨이라도 떨어진 듯, 충격 받은 얼굴로 꼭두새벽부터 찾아온 친구의 발언에 세이라는 으슬으슬 추운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가요? 으음…, 잘 모르겠는데. 그보다 이노리 군, 지금 몇 시라도 생각하는 거예요. 원체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는 생활을 하는 편이라 다행이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아직 자고 있을 시간이다.하품을 하자 흰 입김이 샌다. 어느새 새벽..

40 쿼터 아이스크림

: 타카하타 이노리 할로윈이 지나고 불쑥, 이노리가 아이스크림 한 통을 들고 찾아왔다. 그가 먹을 걸 들고 방문하는 일이야 빈번했고 그 메뉴가 뜬금없는 것도 늘상 있는 일이었지만.“11월에 아이스크림이네요, 이노리 군.”“먹고 싶어서 사왔어~”지나가다 아이스크림 광고라도 본 걸까? 이왕 살 거면 일주일 전에, 그러니까 10월 31일에 샀으면 좀 더 저렴했을 텐데. 세이라는 절약가였고 이런 소소한 것에서 아주 조금, 아까움을 느꼈다. 동전을 하나, 둘 모으는 게 제법 뿌듯한걸요. 그라면 이유를 두고 아주 단순하게 ‘그 날은 호박파이를 먹었잖아.’ 정도로 답하겠지.그래서 세이라는 호박파이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쿼터 사이즈 아이스크림 통을 열게 되었다.열자마자 보인 것은 꼭 짠 것처럼 초록이 반, 갈색..

39 펌킨 할로윈

: 타카하타 이노리 “이런 옷은 대체 어디서 난 거야.”입어달라고 부탁하니 입기는 하였으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어린애처럼 입술을 내밀었다. 보통 할로윈에는 멋진 분장 하지 않아? 그 말에 세이라는 멋있는 분장을 하는 그를 상상해 보았다. 살짝 웃음이 샜다.“장화 신은 고양이님이라면 귀여웠을 것 같아요~”“그것보다 더 멋진 건 없어?”툴툴. 혹은 퉁퉁. 나 아주 불만이 많소, 하고 그는 젖살이 다 빠진 홀쭉한 볼에 바람까지 넣고 흘겨보았다. 그러나 시선 정도로 그녀의 철쭉 같은 미소가 깨지진 않았다. 난장이보다는 장화 신은 고양이가 나을 것 같아서 기껏 제안해주었더니. 사실 세이라 눈에 그는 일곱난장이가 더 잘 어울렸다. 메카에게 부탁하면 이노리를 닮은 일곱난장이 로봇을 만들어줄까.“왕자님이 하고 ..

AF::018. 오늘의 일기 10월 11일

: 올리브 아빠랑은 여전히 매일매일 전화하고 있어요. 아침에도 하고 밤에도 하고. 어떤 날은 짧게 끝나기도 하고 어떤 날은 30분씩 1시간씩 하기도 하는데 그 덕분일까요. 바로 옆에 있는 게 아닌데도 아빠랑 변함없이 함께 있는 기분이에요. 우리 거리가 아주 가깝다고요.하지만 아빠에게는 그렇지도 않았나 봐요.[사실은 말이다. 나는 네가 곧 돌아올 줄 알았어.]어느 밤, 아빠가 문득 말을 꺼냈어요.[여행이 힘들거나 집에 가고 싶거나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말이다. 여기가 네 집이니까. 때가 되면 돌아올 줄 알았단다.]그런데 그것도 내 욕심이었던 모양이야. 하고 아빠는 조금 힘없이 웃었어요.[디모넵. 그곳이 이제 네 새 집이니?]──이곳, 꽃향기마을의 집은 예전 집이 되어버렸어? 묻는 아빠의 물음에 ..

AF::017. 오늘의 일기 6월 29일

: 린 유우 “그럼 나중에 만나요.”전화를 끊은 디모넵은 화면이 꺼진 휴대폰을 들고 갸웃거렸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꼭 3일 낮 땡볕에 노출되어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해 시들시들하게 익은 풀 같았다. 그러고 보니 유우는 더위에 약했던가. 그의 체온은 평균보다 살짝 낮아서, 만지면 이쪽이 시원해지곤 했는데 정작 그 본인은 더위에 약하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파충류….’동물에 비유하자면 까칠한 고양이, 아니면 예민한 토끼라고 몰래 생각해 왔었는데 이렇게 보니 유우에게서 자기 체온을 조절하지 못하는 게 파충류가 떠오르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도 디모넵은 텟샤의 체온을 꼼꼼하게 조절해주고 나온 참이다. 유우도 지금쯤 흐물흐물해진 걸까.―상상하고 몰래 웃었다.“시원한 마실 거라도 사갈까, 테페?”작은 ..

Home, Sweet Home

: 루 모겐스 집이 생겼다. 전에도 있었지만 이번 집은 다르다. 에슬리의 집이다. 루와 함께 사는 집이다. 그 말이 몹시 특별했다. 안심하고 쉴 수 있는 공간이면서 누가 뭐래도 내 것인 공간. 나의, 우리의 집.「에슬리랑 같이 살고 싶어.」우리의 것이었다. 그가 욕심내고 그녀가 욕심낸.단순히 공간을 갖게 되었단 의미가 아닌 걸 그는 얼마나 알까. ‘우리집’이라는 울림이 에슬리에게 주는 특별함을. 그 순간에는 조금 울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슬프거나 기쁜 것과는 다른 감각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 먼 길을 맨발로 걷던 끝에 찾아낸 더는 걷지 않아도 되는 곳. 옆자리가 비지 않는 곳. 당시의 감정을 말로써 풀어낼 수 있던 건 조금 더 지나서의 일이지만. 그 때는 마냥 벅차올라 발만 동동 굴렸다. 떠올리면 살짝..

with.루 2020.10.07

A warm autumn morning

: 루 모겐스 아침이 밝았다. 에슬리는 내리 쬐는 햇살에 흠뻑 젖어 눈을 떴다. 새벽이슬이 마르며 드는 촉촉하고 서늘한 공기가 창틈으로 새어들었다. 베일의 아침이라고 이트바테르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인걸. 대신 에슬리의 방 아침이 루의 방과 달랐다.벽으로 난 창이 크고 커튼은 얇았다. 햇빛을 가리기 위한 실효성은 그다지 있어 보이지 않았다. 따스하고 온화한 빛이 부드럽게 스미기보다 넓은 창을 통해 욕심껏 쏟아졌다. 그러면 에슬리는 원기를 회복하듯 한껏 기분 좋은 표정으로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고 옆자리의 연인은──“으윽…….”마치 태양을 피하는 뱀파이어라도 된 것처럼 꾸물꾸물 이불을 위로 끌어 올려 빛을 가려들었다. 그의 손을 따라 오트밀 색의 이불이 죽 당겨졌다. 보들보들하면서 따뜻..

with.루 2020.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