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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전부를 당신에게

For.주노 더보기 똑딱똑딱. 머릿속의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동안 신중하게 스톱워치를 응시하던 에셸은 드디어 디지털시계가 참 멋없다던 할머니의 말을 이해했다. 빠르게 휙휙 올라가는 숫자를 따라가는 건 굉장히 마음이 쫓기는 일이었다. 눈보다 소리로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래도 중요한 타이밍이니까요. 두근거림과 설렘을 안은 채 시계가 정확히 0시 0분에 도달하자마자 초인종을 누른다. 딩-동. 경쾌한 소리가 마음의 문까지도 노크하는 듯했다. [……그래서 내일은, 어라? 이, 이런 시간에 누구지……?] “후후후. 누굴까요~?” [엣? 그, 자, 잠시만──] 휴대폰 너머로 우당탕하는 소리가 이어지고 현관이 열릴 때까지 위키링과 바나링을 양옆에 대동한 채 에셸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 얼굴이 얼마나 장난스러..

with.주노 2022.05.21

07) 레몬, 후르츠 롤케이크, 팝핑캔디

For.주노 더보기 ─첫키스는 어떤 느낌일까요? 소설에서는 레몬 맛이 난다고 표현하더라고요. 어째서 레몬 맛일까요. 딸기 맛이나 복숭아 맛은, 사람의 입술은 과일 맛이 나는 걸까요? 언젠가 친구는 첫 키스에서 레몬 맛 같은 건 나지 않는다고 투덜댔어요. 환상이 깨졌다고. 그러더니 다음날에는 레몬사탕을 입에 물고 키스했다고…… 어머나. 드라마나 영화 속의 키스장면은 어땠더라. 그다지 유심히 본 적이 없어서 막상 떠올리려니 뭉뚱그린 화질의 풍경만 스쳐갔어요. 대개 영화 속 장면들은 아름답게 연출되곤 하잖아요. 얼굴이 포개지면서 카메라가 빙글빙글 돌고 두근두근한 음악이 흘러가고 그 한폭의 컷이 예뻐서, 막연하게 첫키스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인식했어요. 언젠가 저도 영화 속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날이 올 거라고 아..

with.주노 2022.05.11

47 좋은 일이 있었어

: 타카하타 이노리 더보기 코이노보리가 펄럭이는 어린이날이었다. 날씨가 맑아 기분이 좋았다. 어린이날 기념으로 아이들과 함께 특별한 뜨개 교실을 열었다. 자신이 만든 걸 뿌듯하게 품에 안고 돌아가던 아이들의 뒷모습을 배웅하고 세이라도 가게를 조금 일찍 정리했다. 오늘의 주인공들은 남은 하루도 즐겁게 보내고 있을까? 이제 저녁 시간은 무얼 할까 고민하던 중 전화기가 울렸다. 「세이라, 지금 집에 있어~?」 “네에. 있는데요?” 「그럼 나 5분 뒤에 도착할 거니까.」 “네에. ──에?” 네에에~??? 제 목소리가 커지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너머의 상대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희미하게 들리는 콧노래를 두고 세이라는 허둥지둥 집안을 돌아봤다. 주말에 춥다고 꺼내두었던 두터운 담요는 소파에 널브러진 채였고 ..

05) In the box Sequence

For.주노 더보기 S#1. 갑자기 세상이 어두워졌다. 갑자기 세상이 어두워졌다. 이 표현에는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있다가 세상이 어두워진 것이 아니다. 그보다 우리가 어두운 곳에 갇히게 되었다는 말이 맞을까. 포인트는 ‘갑자기’보다도 ‘우리’에 있었다. -에, 에셸 씨. 괜찮…으세요? -ㄴ, 네. 저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그, 글쎄요. 저도 잘……. 좁은 공간에 연인이 함께 갇혔다. 옷감이 스치는 바스락거림, 지척에서 느껴지는 숨결, 쿵쾅거리는 심장의 고동. 모든 소리가 생경하면서 생생했다. 뜨겁게 닿는 체온, ──그보다 체온이라면 지금 어디가 닿은 거지? 의식과 동시에 손바닥에 힘이 들어갔다. -자, 자자, 잠깐, 우, 움직이지 말아주세요!! 우뚝. 다급한 목소리를 따라 스위치..

with.주노 2022.05.03

04) 지난번에 구해주신 토끼가 사실 당신을 사랑이라는 함정에 빠트리는 무시무시한 마녀였습니다.

For.주노 더보기 기억하고 있나요? 왜, 지난번에 그런 일이 있었잖아요. 당신에겐 너무나 당연하고 별 거 아닌 일이어서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사냥꾼의 덫에 걸린 토끼를 놓아준 일이요. 사냥꾼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맘대로 덫을 풀어줘도 되는 걸까. 얼굴에 오만 고민을 담고서도 당신은 그 분홍색 토끼의 애처로운 시선을 외면하지 못하고 날카로운 쇳덩이의 입을 벌려 토끼를 구해주었죠. 토끼는 그런 당신에게 꼭 은혜를 갚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만약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었다면 어떨까요. 보통의 동화와는 다른 이야기죠? 왜냐하면 토끼는 사실 무시무시하고 사악한 마녀였고, 마녀는 선량하고 다정한 인간 청년에게 홀딱 반해버리고 말았거든요. 은혜를 갚는다고 해놓고 그의 주위를 빙빙 맴돌던 마녀는 생각했죠. ..

with.주노 2022.05.02

03) 모닝키스

For.주노 더보기 잠귀가 어두운 편인가 하면 보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아주 예민하지도 않아서…… 그렇죠. 당신이 주의 깊고 조심스러운 사람이라서 몰랐을 거예요. 일부러 돌아누웠냐고 하면 그것도 아닌데, 그보다 잠들기 전에 어디를 보고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거 있죠. 그저 언제나처럼 의식이 까무룩 침잠하기 전까지 들리던 도란도란한 당신의 목소리, 듣기 좋은 웃음소리, 간질간질한 속삭임, 감싸 안은 팔의 온도, 코끝으로 닿는 체취. 그런 것들로 기억이 모조리 뒤덮여 있어서 방향 같은 사소한 건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당연히 응시한 건너편에 당신이 있을 뿐이었어요. 아주 기분 좋은 시간이었어요. 무언가 꿈을 꾸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냐미링을 행복하게 했을 테니 저도 행복한 셈 하자며 눈을 떴..

with.주노 2022.05.02

02) 청춘의 서두

For.주노 더보기 “저기…… 괘, 괜찮아요?” 어느 가을의 기억이다. 멈춰 있던 손앞으로 캔 하나가 내밀어졌다. 고개를 들자 아직도 사춘기 소년인 것만 같은 풋된 얼굴이 벌겋게 쭈뼛거리고 있었다. 누구더라. 소녀가 고민하는 사이 그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이거, 학생회에서 나눠준 건데. 못 받았으면. 바, 받았으면 제가 마실게요. 그……. ……지친 것 같아서. 첫 학생회, 첫 문화제 준비로 한창 들뜨고 바쁘던, 모든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던 정취 속에서 건네진 말. 건네진 따뜻한 캔 음료, 상대를 이제야 떠올린다. 한 학년 위의 선배. 그러니까, 이름이 아마도── “주노! 이쪽 좀 와줄 수 있어?” “아, 지, 지금 갈게!” 주노. 본래 학생회는 아니라고 했다. 문화제로 일손이 부족하니까 잠깐 도와..

with.주노 2022.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