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861

127. 오늘의 친구 3월 15일

: 엘리자베스 다정한 온도, ───동경하던 빛은 어떤 색으로 반짝였을까.말없는 풀, 뿌리내린 나무, 늘 그 자리에 있는 것, 피고 지고 생을 반복하는 것, 인간의 잣대로는 가늠할 수 없는 저마다의 시간을, 삶을 살아가는 사랑스러운 존재들. 아이가 사랑하던 세계.한없이 따사롭고 안온한 곳, 영원이란 멀리 있는 이름이 아니다. 사철의 변화가 없는 마을과 태어나서 지금까지 머문 화원은 자체로 영원한 것만 같았다. 그곳에 머물 수도 있었다. 고이려는 것이 아니다. 그 땅에서 이루어지는 순환의 일부가 되어도 좋았다. 그럼에도 뛰쳐나온 건 스스로의 선택이었다.모든 선택에 커다란 의미가 있지는 않다. 갈림길에서 방향을 정하고 발을 내밀기까지 대단한 결심 같은 건 없어도 좋았다. 사소한 계기, 한 번 움직일 힘, 시작..

126. 오늘의 친구 3월 14일

그 아이, 닮은꼴이 많은 친구 린과는 캠프 초창기부터 금세 친해졌던 것 같아요. 그야 린은 좋은 아이이고 누구와도 잘 지내고 우리는 동갑내기에 처음부터 마음이 잘 맞기도 했으니까 금방 친해지는 건 이상할 게 아니지만, 조금씩 교류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단지 그뿐만이 아니었단 걸 알게 됐어요.우린 닮은 점이 많았어요. 겉보기나 관심사만이 아니라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안쪽으로 말이죠.「가족보다 다른 게 중요한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거니까?」「저는 디모넵 씨가 바라는 어머니는 되어줄 수 없습니다.」린의 말에서 달리아 씨를 떠올렸어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건, 그게 다른 ‘보통’의 집안과 다르다는 건 마음에 깊은 흉을 남기는 것과 같아요. 아무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린을 사랑해..

125. 오늘의 포켓몬 3월 13일

어제 배틀은 지고 말았어요. 여러 가지로 수읽기에서 실패한 것도 있고 테마리가 생각보다 마비에 약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테마리는 어제 자기가 두 번이나 움직이지 못한 것이 분통터지는 것 같았어요. 씩씩거리며 그깟 쥐가 다 뭐냐고 애꿎은 피카츄를 잡으러 가겠다고 날뛰는 통에 말리느라 고생했지 뭐예요.그렇지만 마비는 정말 무서운 기술이네요. 저도 그걸 위해서 텟샤에게 뱀의 눈초리라는 기술을 알려주었지만─물론 그게 아니어도 알려주고 싶은 기술이었어요. 샤로다에게 정말 어울리는 기술 아닌가요?─결국 써보지 못하고.살비전 때도 생각하지만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거나 그런 과감한 전법은 제게 정말 어울리지 않나 봐요. 저는 ‘이번엔 껍질 안 깨?’ 하고 눈으로 묻는 테스티아를 꼭 끌어안은 채 이번엔 어떻게 하..

124. 오늘의 일기 3월 13일

샛별시티의 카페는 겨루마을이랑은 전혀 다른 엄청나게 세련된 분위기였어요. 오늘 만나기로 한 곳은 백화점에 있는 한 프랜차이즈였는데 카페를 검색하면 제일 먼저 나오는 곳이 엄마가 고를만한 곳이었다고 생각했지 뭐예요. 강변에 전망 좋고 디저트가 맛있기로 유명한 곳이 있다고 마침 저도 검색하다 발견했는데, 여긴 이 다음에 캠프 사람을 꼬셔서 가야겠어요.신기하게도 엄마를 만나러 가는 발걸음에는 아무런 무게도 담겨 있지 않았어요. 겨루마을에서는, 금방이라도 꼭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는데 말이죠. 와이는 이런 저를 두고 역시 아쉽다고 했는데요. 저는 그조차도 모르겠는 기분이었어요. 그냥, 나쁘지 않았어요. 어쩌면 오늘 날씨가 좋은 덕인지도 몰라요.“그치, 테리?”저번엔 나무지기 시절의 테이만 데려갔었는데 오늘은 ..

123. 오늘의 의뢰 3월 13일

클럽 『슈팅스타』의 일일 웨이터 “정말 너희를 이런 일에 부려먹어도 되는 걸까~”저희에게 웨이터 복장을 지급해 주면서도 의뢰인인 클럽의 스태프는 미안하고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어요. 듣기로는 트레이너 캠프와 데코 씨가 서로 합의한 사항이라고 하지만─많은 경험을 시켜주기 위해서요─, 스태프 분이 보기에는 ‘무려 라이지방을 구한 영웅을! 클럽의 웨이터로!’가 된 모양이지 뭐예요.우리 주위에 다른 직원들도 누구는 신기한 듯 누구는 대단한 듯 아무튼 정말 일일 웨이터보다는 팬미팅이라도 된 것처럼 쳐다보고 말을 걸어와서 얼굴이 달아오르고 말았어요. 이런 대접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데. 특히 이런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는 리브는 도망가 버리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덤덤한 얼굴로 옷을 ..

122. 오늘의 도전 3월 12일 VS 데코 씨

이기는 것만이 유대의 증명이 아니라고 드레인저 씨는 말했어요. 트레이너의 본분이 배틀은 아니기도 해요. 그렇다면 저는 어째서 체육관 챌린지를, 배지 모으기를 계속하고 있는 걸까요. 스스로에게 물어봤어요. 솔직한 가장 커다란 이유를 한 가지 대자면 「뒤쳐지기 싫어서」일 거예요.14살의 아이는 그런 것에 신경을 많이 쓴단 말이죠. 그룹에 섞이지 못하는 걸요. 캠프 사람들이 제가 배지를 못 땄다고 해서 뭐라고 할 게 아니라는 걸 의식적으로는 알면서도요. 말하자면 자격지심이에요.「뭐 어때? 내가 못 쫓아가면 내가 달려가 맞추면 되는 거고, 남이 못 쫓아온다면 그 녀석들의 속도에 맞추어 줄 것 같은걸.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함께 지내는 게 공동체니까.」「그럼 제가 못 따라가면요?」그 때 쟈키 씨가 들려준 말이..

121. 오늘의 아르바이트 3월 12일

그 첫 번째, 포켓몬 센터의 건강검진과 심리 상담 알면서 하는 거랑 모르고 하는 거랑 어떤 게 더 나쁜 행동일까요? 저는 단연 전자라고 생각해요. 무지가 면죄부가 될 수는 없지만 그쪽은 뭐라고 여지라도 있거든요. 그런데 알면서 저지르는 것에는 변명의 여지도 없지 않나요?그리고 저는 알면서도 저지른 쪽이었어요. 아마 이건 앞으로 평생토록 제 마음의 가시처럼 박혀 남아 있겠죠.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듣더라도요.새벽 같이 포켓몬 센터를 찾아와 아직 아무도 없는 복도에 멈춰선 제 앞으로 불과 며칠 전의 풍경이 지나갔어요.「어리신 분들께선 연구실로 가지 않으시는 것이……」「개인의 호기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니까요.」연구실을 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릴 때에 거의 모두가 만류했던 것 같아요. 말리지 않은 건 오드리 씨와 ..

120. 오늘의 일기 3월 11일

오늘은 일기 대신 경이로운 발견에 대한 정리와 초록입니다.어머니 달리아 라지엘 씨는 늘 전설의 포켓몬의 존재에 관해 부정적인 의사를 표하곤 하셨습니다. 만약 전설의 포켓몬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 힘은 ‘전설’이란 칭호에 미치지 못할 그저 포켓몬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이며 여러 전설과 신화 속의 초월적인 사건들은 세월을 따라 부풀려진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습니다.혹은 그 시대에서 발견된 엄청난 에너지원이 한 순간에 기적 같은 힘을 보인 것이라고요. 이를 테면 호연지방에 과거 운석이 떨어질 뻔했던 사건처럼. 어머니는 깨어진 세계를 증명하는 일에도 관심을 보이셨는데 이는 기라티나의 존재를 믿거나 깨어진 세계가 저승이라는 가설이 아니라 그 세계와 블랙홀의 연관성을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하지만 작일, 어머니의 ..

119. 오늘의 전투 3월 10일

처음이자 마지막, 우리 모두의 이야기 어제 노바 단체를 제압하는 일을 마무리 짓고 나서, 간신히 숙소를 빌린 캠프는 정말 초상집이 따로 없었어요. 초상집이라면 초상집이었겠죠. 우리가 알던 사람이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저는 괜찮았냐고요? 이럴 때 제 얘기는 하지 말도록 해요. 중요한 건 저보다도 다른 상처 입은 사람들이었으니까.신뢰는 배신당하고 신의는 땅에 떨어지고 기대마저 잃고 나면 남은 건 오로지 실망과 슬픔뿐이었어요.세상은 여전히 캄캄한 채였는데요. 간신히 위아래 사방이 가로막힌 답답한 방화벽에서 나와도 별빛마저 죽어버린 것 같은 어둔 도시에서 빛나는 것이라곤 오로지 하늘의 뿔뿐이어서, 이 세상에 끝이 온다면 이런 풍경이지 않을까 했어요. 인간이 만든 인공의 빛은 모두 거두어지고 오직 전설적..

118. 오늘의 일기 3월 10일

포켓리스트가 연결되자마자 제일 먼저 수도 없이 많은 아빠의 메시지와 부재중 연락이 쏟아졌어요. 빼곡히 저를 걱정하는 메시지에 하나하나 다 읽지 않아도 마음이 뭉클해질 것 같았지 뭐예요. 동시에 하나하나 다 읽기에는 너무 피곤해서, 괘씸하게도 읽는 건 나중으로 미루고 바로 아빠에게 괜찮다는 전화를 하려고 했어요.그러다 발견한 거예요. 아빠의 연락 사이사이로 엄마의 메시지가 끼워져 있는 걸. 보자마자 눈을 의심했어요. 엄마가 왜? 한 번도 먼저 연락한 적이 없는데. 아빠가 엄마에게도 연락한 걸까요. 그래서…? 그렇다고 해도요.엄마에게 먼저 연락을 해야 할까요. 통화 버튼을 눌러볼까, 아빠부터 연락할까. 머뭇거리던 때였어요.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엄마에게 전화가 왔어요. 그리고 제가 전화를 받지 못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