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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

: 루 모겐스 「이거, 같이 적어보지 않을래?」그렇게 말하며 루가 가져온 건 다이어리였다. 매일매일 질문이 하나씩 있는, 두 사람이 함께 쓰는 다이어리. 페이지를 한 장 넘기면 새로운 질문이 있어서 두 사람이 각자 질문에 대한 답을 적으면 된다고 했다.헤에, 재밌겠다.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글씨 서툴러도 놀리면 안 돼. 그녀의 말에 루는 물론이야. 하고 웃어주었다.질문 하나에 답은 두 개. 그 밑으로 조금 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어보기도 한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다이어리에 적힌 그의 말을 보는 건 신선하고 새삼스러워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다이어리를 놓아둔 탁자 앞을 서성이며 왔다 갔다 해버렸다.다이어리를 넘기고 있으면 오래 전 주고받았던 편지를 떠올리게 했다. 아니면 교환 일기..

with.루 2018.07.09

지구 반대편에서

: 루 모겐스 하아───. 입김을 내뱉자 창가에 하얀 김이 서렸다. 그 위로 뽀득뽀득 낙서를 한다. 하트를 그렸다가 그의 이름을 적었다가 아, 뒤에서 그가 오는 기색에 후다닥 소매 끝으로 지워버렸다. 다시 깨끗해진 창 너머로는 까만 하늘로부터 송이송이 떨어지는 함박눈이 있었다.언제나 겨울인 이 지역은 눈구름이 없어도 눈을 쏟아내는 마법이라도 걸렸는지 별빛과 눈이 한 풍경에 담겨 있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후, 숨을 내쉬자 다시 창에 김이 서린다. 이번에는 창에 웃는 얼굴을 그려 넣자 그녀의 뒤에 앉은 그가 팔을 뻗어 껴안아왔다.“오늘 중으로 마차가 오는 건 무리래.”“역시? 그럼 이제 어쩌지. 꼼짝없이 여기서 해 뜰 때까지 있어야 하나.”“저쪽에서 임시 숙소를 제공해준다던데.”어떻게 할래? 물어보면..

with.루 2018.07.05

여름의 시작

: 루 모겐스 “다녀왔어.”느긋한 목소리와 함께 현관이 철컥 열린다. 다녀왔어, 루? 벌떡 일어나 현관까지 마중 나가려던 에슬리는 막 신발을 벗는 그를 보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아, …어때?”살짝 쑥스러운 빛을 하며 그가 허전한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문지른다. 손바닥에는 흰 목선만 닿았다. 평소라면 목가에서 느슨하게 묶어 어깨 아래로 닿았을 옅은 회색의 머리카락이 지금은 귀를 살짝 덮을 정도만 남아있는 것이다.어쩐지 오늘은 어딜 가는지도 말해주지 않고 “금방 다녀올게.” 그렇게 훌쩍 나갔다고 생각했다. 어떠냐고 묻는 그를 앞에 둔 채 에슬리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그러다 한 박자 늦게 후다닥 소파 뒤로 숨었다. 이상해? 반응이 신경 쓰였는지 그가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에슬리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with.루 2018.07.05

내 연인은

: 루 모겐스 언제나처럼 가볍게 서로 어울려 장난을 치는 시간이었다. 열어놓은 창문으로는 햇살과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슬슬 바람이 더운 것도 같네. 여름이 오려나. 그런 대화를 나누었을까. 그의 위에 올라앉자 히죽거리는데 그가 슬쩍 상체를 들며 눈을 마주쳤다. 잠깐의 신호였다.어깨를 감싼 커다란 손에 침대의 스프링이 삐걱 소리를 내며 크게 흔들리고, 두 사람의 위치가 순식간에 뒤집힌다. 얇은 이불이 펄럭이다 가라앉으면 이번엔 내 차례야. 그렇게 말하기라도 하려는 듯한 그의 얼굴이 보여서 소리 높여 웃었다.이리 와. 제 위로 드리운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당기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얼굴을 묻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먼저 뺨과 목에 닿고 이어 입술이 닿는다. 쪽쪽, 쪽, 일부러 내는 소리는 어딘가 웃..

with.루 2018.07.05

어둠이 내려앉을 때

: 루 모겐스 “손이 멈췄습니다, 레이디 챠콜. ……나를 유혹하려던 게 아니었나요?”말투는 한없이 정중하면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어딘지 도발하듯 얄밉다. 그의 셔츠 자락에 손을 올리다 그대로 멈추고 말았던 에슬리는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처럼 단추를 풀어나가던 손은 애매한 지점에서 멈춰 굳어버린 채였다.풀어헤쳐진 셔츠 안쪽의 살이 희다. 햇빛에 닿은 적 없다는 듯 검은 셔츠와 대비를 이루는 가슴은 하지만 의외로 제법 탄탄했다. 책밖에 모르는 도련님인 줄 알았더니, 자기 관리는 하고 있다는 걸까.──그야 제국군의 전(前) 기사라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그는 꽤나 역할극에 몰입한 것 같았다. 평소라면 일부러라도 더 지우려고 하는 귀족의 면모를 숨기지 않고 내보이는 것부터가. 뒷머리를 쓰다듬는 긴 손가락에..

with.루 2018.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