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의 서막 57

800년 후의 당신에게

: 아니카 와일리 무거운 공기가 감도는 공간이었다. 무겁고 정결한, 지나치게 깨끗한 나머지 부담스러울 만큼 신성한 공기로 채워진 공간은 숨을 쉰다는 당연한 행위조차 불편하게 만들었다. 목 끝까지 채워두었던 제복을 느슨하게 풀며 에슬리는 어깨를 휘휘 움직였다. 찌뿌듯해. 이럴 거면 변이종 상대가 백배는 쉽지.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번에 그녀가 의뢰 받은 일은 고대 유적의 탐사였다. 비공식적으로는 트레저 헌터니 모험가니 멋대로 돌아다니지만 공식적으로는 국가의 허락 없이 출입이 제한되어버린 거대한 신성의 장(場) 테힐라. 그 중에서도 천 년도 전에 세워졌다는 유적지를 목적지로 했다. 최근 그 주변에 이상한 기운이 감돈다고 했던가. 그 심상치 않은 기운을 파헤치는 게 이번 탐사의 목적이고 그를 위한 파티를 꾸리는 ..

심연의 서막 2018.05.25

[호그와트AU] 기숙사 배정

챠콜, 에슬리.이름이 불림과 동시에 에슬리는 폴짝 뛰어오를 듯 일어나 모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거의 달리기에 가까운 경보였지만 아슬아슬하게 달리진 않은 몸짓에 교수석에 앉아 있던 선생 중 누군가는 표정을 찡그린다. 예의가 없어. 슬리데린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서는 대놓고 질색인 표정을 내보였다. 저런 애가 우리 기숙사에 올 리는 없지. 어느 가문이야? 머글 출신이라고? 그새 슬리데린의 정보망으로 낡은 옷차림을 한 꼬마 계집에 대한 정보가 퍼진다. 한참 자기들끼리 수군대던 슬리데린은 곧 저 꼬마가 자기네 기숙사에 배정될 일이 없단 결론을 내리고 안심한 얼굴로 나란히 외쳤다. 저런 아이까지도 이곳 호그와트에 입학할 수 있다니, 멀린의 자비란!래번클로의 학생들은 대부분 관심 없단 표정이었다. 저 아이가 우리..

심연의 서막 2018.01.21

자랑스러움

: 나디아 에르하르트 해가 높이 뜬 시간이었다. 산 중턱을 깎아 지은 제국의 수도, 심장부라고도 불릴 수 있는 이곳 아델하이는 마침 구름 한 점 없이 쏘아내리는 햇빛을 받으며 약간의 긴장과 정적을 두르고 있었다. 오늘이 바로 1년에 한 번 치르는 신년 의례 날이다. 입지적 이유로 평민들은 거의 기거하지 않는 수도였기에 신년 의례라고 해도 대단한 의미를 갖추진 않았다. 늘상 보는 귀족들이 참석하여 식상한 인사를 나누었고 서로 눈치를 살피며 정보를 주고받는 거대한 정치판이 하나 더 생길 뿐. 최근에는 그 외에도 병약한 황제가 아직 건재한지 건재하지 않은지를 확인한다는 의미도 갖추었던가. 무엇이든 그녀, 에슬리 챠콜에게는 귀찮고 지루한 시간에 불과하였지만.커다란 뿔을 든 기사가 신호를 기다린다. 황제의 행차에..

심연의 서막 2018.01.19

[니어:오토AU] 현자 로봇

* 『니어:오토마타』의 스토리 네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현자 로봇과 관련된 네타를 피하고 싶으신 분은 읽지 말아주세요! : 디셈버 & 아라슈 그 날도 변함없이 맑은 날이었다. 이곳의 날씨는 생각보다 변하지 않는다. 그야 비라도 내렸다간 기계로 이루어진 이곳의 생명체─과연 기계에게 생명체라는 표현을 해도 되는가는 차치하고─들도 곤란해질 테니까. 그러고 보니 맑은 날 외의 날씨를 본 적이 없군. 문득 자각하지 못했던 사실을 떠올린 2E는 이런 발상조차 옆의 아이를 닮아버리고 만 것일까 생각하며 곤혹스런 미소를 지었다.“보급 마쳤으면 슬슬 출발할까?”“응!”그에게는 말을 아낀 채 레지스탕스 캠프를 나와서 방향을 잡는다. 목적지는 파스칼의 마을. 그곳에 가서 파스칼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최단 루트는..

심연의 서막 2017.11.12

인간

: 카누트 【나는 언제쯤 당신 눈엔 ‘인간’이 될까.】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언가가 억눌러와, 소리를 낼 수 없었다.【──그야 지금도, 나는 인간이지만.】아냐. 아니다. 나는 절대 그런 말을……───!벌떡,“……아 이런. 아침부터 꿈자리가 영 좋지 않아.”잠에서 깨어난 카누트는 그 길로 에슬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하하, 그래서 갑자기 불러낸 거예요? 깜짝 놀랐잖아요. 「오늘 수업 몇 시에 끝나? 스케줄 있어?」 하고 연락 와서. 재스퍼 아저씨하고 싸우기라도 한 줄 알았네.”“싸우지 않았어. 그보다 싸워도 너한테는 안 가지.”“에에, 뭐예요. 어린애한텐 말 못한다는 거? 의지해줘도 되는데~”“누가 누구에게 의지를 하라고.”남자가 한숨을 푹 내쉬자 맞은편에 앉은 교복 차림의 여자 아..

심연의 서막 2017.11.07

가호를

: 카누트 “──어라, 키티?”무심코 입에서 그 단어가 튀어나왔을 때, 그녀의 앞을 지나가던 사람은 분명 그 말에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아주 일순이었고 그는 그대로 앞을 걸어갈 뿐이었다.그녀가 잘못 본 게 아니다. 상대가 무시한 거지. 그가 직접 말한 건 아니지만 아마도 그 때 그의 머릿속을 스친 건 ‘누가 키티야?’ 정도가 아니었을까.그래서 에슬리는 그의 앞을 달려가 가로막고는 제대로 얼굴을 본 채 한 번 더 말해주었다.“역시 키티 맞잖아~”“누가 키티야?”그리고 이번엔 육성으로 들었다. 오랜만에 들은 목소리에 까르르 웃음부터 터트린다. 그리고는 변함없이 무례한 손가락질을 하며 외쳤다. 오랜만이네?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어. 그렇지. 정말 오랜만이었고 또 의외의 장소에서의 만남이었다. 설마 대륙도 아..

심연의 서막 2017.11.07

To Be With You

: 루 모겐스 『가지 마.』───잘못 들은 줄 알았다.어쩌면 듣고 싶었던 말이어서, 기다리던 말이어서 환청이 아닐까 의심부터 들었다. 잡힌 손이 뜨겁지 않았더라면 믿지 못했겠지. 그의 손이 천천히 내려와 제 손을 잡았을 때도 여전히 현실감은 없었다. 다만 그에게 잡힌 손이 지독하게 차다는 감각만 느껴졌다.추웠다. 손발의 피가 모두 식어버린 듯 얼음덩어리를 매단 듯 무거웠다. 느릿하게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온전히 들리는 대신 종소리처럼 퍼져 목소리의 진동만이 피부에 닿았다.그만큼 바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사랑해.』누구를?───나를?하지만, 어째서,왜……?어떻게?머릿속에서 파도가 일었다. 아주 커다란 파도가 의식을 전부 덮어버릴 만큼 강하게 일었다. 응시해오는 그의 눈동자를 보고 한참을 멍..

심연의 서막 2017.10.07

전하고 싶은 이야기

: 루 모겐스 *모바일이나 창을 줄여서 보는 편이 읽기 편할 거예요:) #. 어느 밤이었어,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일상의 「잘 지내.」「응, 또 만나.」머나먼 기억이다. 겨울이 거듭되는 그곳에서 겪은 이별, 이별 후에 있을 재회의 약속.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고 가슴 벅차오르던 시간 속에서 이상하게 그 때만은 무언가 다르다고 느꼈다.많고 많은 일들 가운데 딱 한 순간, 그 순간 특별하게 울리던 심장 박동. 멀어져가는 그의 마차를 보면서 느낀 두근거림과 쓸쓸함, 그리고 애틋함.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던 첫 자각이 아니었을까.“루, 별을 보러 가지 않을래?”조금씩 쌀쌀해지던 어느 날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보내던 많고 많은 날 중 하루였다. 어둑해진 하늘을 창밖으로 올려다보던 에슬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여상..

심연의 서막 2017.10.02

서쪽으로 향하면 나오는 것

막 사막에서 들어온 여행자들은 머리끝까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머리 위로는 노란 모래알들이 후두둑 쌓여 여행자들이 걸을 때마다 등으로 어깨로 사르륵 떨어져 내렸다. 흙먼지와 모래알, 무기가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걸어가는 이들은 평범한 마음이라면 환영받지 못할 객이었지만 다행히 이곳은 그들과 같은 용병이 드물지 않은 마을이었기 때문에 다들 무심한 눈으로 스쳐지나갈 뿐이었다.황폐화가 진행 중인 사막에서 몇 마을을 거치면 나오는 이곳은 의뢰를 받고 사막을 전전하는 용병들이 물자를 보충하러 종종 방문하는 곳이었다. 사막 근처의 마을도 생필품은 취급했지만 사막과 가까워 보급이 어렵단 이유로 값이 비싸기 때문에 여유가 있는 용병들이라면 조금 멀어도 이곳이나 이 너머까지 와 물자를 사가곤 했다.지금 막 사막..

심연의 서막 2017.10.02

장마, 꿈, 동화의 끝

: 아라슈 #.1하늘 조각을 떼어온 듯 새파랗던 날개가 오늘도 까맣게 젖어 있다. 어제보다 조금 더 까맣게 젖어 있었다.장마가 그치지 않고 있었다. #.2“에슬리. 좋은 아침이야!”“좋은 아침, 랏슈. 잘 잤어?”제 물음에 그는 느리게, 호흡하듯 눈을 몇 번 깜빡이다 곧 초승달처럼 휘며 물론이지. 하고 답하였다. 물음과 답 사이의 간극은 서로 건드리지 않았다. 날개와 다르게 여전히 초순(草筍)과 같은 눈동자는 맑은 빛을 보였다. 손을 뻗어 그 눈 꼬리를 만지자 잔웃음소리가 들린다. 그의 기분을 따르듯 전보다 더 자란 첫 번째 날개가 미풍을 만들어, 손등을 간질이는 바람에 눈가를 문질러주던 손을 조금 더 뒤쪽으로 뻗으려하자 일순 그가 굳었다. 그러나 머뭇거림은 찰나였다. 어깨가 느슨해지며 보여준 암묵적인 ..

심연의 서막 2017.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