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루 49

내 연인은

: 루 모겐스 언제나처럼 가볍게 서로 어울려 장난을 치는 시간이었다. 열어놓은 창문으로는 햇살과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슬슬 바람이 더운 것도 같네. 여름이 오려나. 그런 대화를 나누었을까. 그의 위에 올라앉자 히죽거리는데 그가 슬쩍 상체를 들며 눈을 마주쳤다. 잠깐의 신호였다.어깨를 감싼 커다란 손에 침대의 스프링이 삐걱 소리를 내며 크게 흔들리고, 두 사람의 위치가 순식간에 뒤집힌다. 얇은 이불이 펄럭이다 가라앉으면 이번엔 내 차례야. 그렇게 말하기라도 하려는 듯한 그의 얼굴이 보여서 소리 높여 웃었다.이리 와. 제 위로 드리운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당기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얼굴을 묻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먼저 뺨과 목에 닿고 이어 입술이 닿는다. 쪽쪽, 쪽, 일부러 내는 소리는 어딘가 웃..

with.루 2018.07.05

어둠이 내려앉을 때

: 루 모겐스 “손이 멈췄습니다, 레이디 챠콜. ……나를 유혹하려던 게 아니었나요?”말투는 한없이 정중하면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어딘지 도발하듯 얄밉다. 그의 셔츠 자락에 손을 올리다 그대로 멈추고 말았던 에슬리는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처럼 단추를 풀어나가던 손은 애매한 지점에서 멈춰 굳어버린 채였다.풀어헤쳐진 셔츠 안쪽의 살이 희다. 햇빛에 닿은 적 없다는 듯 검은 셔츠와 대비를 이루는 가슴은 하지만 의외로 제법 탄탄했다. 책밖에 모르는 도련님인 줄 알았더니, 자기 관리는 하고 있다는 걸까.──그야 제국군의 전(前) 기사라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그는 꽤나 역할극에 몰입한 것 같았다. 평소라면 일부러라도 더 지우려고 하는 귀족의 면모를 숨기지 않고 내보이는 것부터가. 뒷머리를 쓰다듬는 긴 손가락에..

with.루 2018.07.05

해질녘 너머, 별이 빛나는 우리의 밤

: 루 모겐스 ※ 이하의 글은 오퓸님의 coc 시나리오 「해질녘과 저무는 너」의 플레이를 바탕으로 쓰였으며 해당 시나리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열람에 주의해주세요. ※원문 시나리오 : https://opium-poppy.postype.com/post/1686187 “…있잖아, 에슬리.”붉은 태양을 등지고 그가 이쪽을 돌아본다. 그의 웃는 얼굴은 익숙하고 익숙한 만큼 그녀에게 안도를 주는 것이었지만 이 때의 미소는 그렇지 못했다. 어떤 미소였을까. 슬픈 것 같기도 하고 후련한 것 같기도 하고, 중요한 건 내뱉을 뒷말에 그녀는 고려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나를 죽여줄래?”봐. 그렇지?아연한 그녀와 그의 사이를 비집고 바람이 한 줄 불었다. 온화한 봄이라고 여긴 계절이 돌연 한없이 잔혹하고 스산..

with.루 2018.05.18

어린이날

: 루 모겐스 “에슬리랑 놀고 싶어! 에슬리가 안아주고 책 읽어줬으면 좋겠어~!”말의 머리에도 꼬리에도 하트가 뿅뿅 달라붙어서는 날아올 것만 같다. 배후로는 꽃과 반짝이도 보일 것 같은데……, 이럴 때면 새삼스럽게 어디서 이런 뻔뻔함이 나오는 건가 싶다.새삼스럽게 놀라지는 않았다. 자기보다 4살 위의 연인이 갑자기 제 키의 반 토막 수준의 꼬마로 변해버리는 것도, 부끄러움도 없이 그 얼굴을 이용해 순진한 어린아이인 척 구는 것도. 그가 표정만으로 그녀를 궁지에 모는 일이야 곧잘 있는 일이었고, 이미 한 번 몸은 그대로인 채 정신만 어린아이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 그 반대라고 없을 건 없지.“정말~ 안 통해? 으응? 에슬리?”“……하아.”없을 건 없지만── 그렇다고 꼬마의 위로 연상의 연인의 얼굴이 겹쳐 ..

with.루 2018.05.07

영원 대신

: 루 모겐스 밤이 내려앉은 배경을 바탕으로 창가에 두 개의 꽃병이 놓여 있다. 한쪽 꽃병 안을 채운 건 물안개가 떠오르는 옅은 청회색의 안개꽃, 그리고 사이로 해님처럼 노랗게 피어 있는 민들레, 한 자리에 모여서 피기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 것 같았지만 꼭 그 위로 햇살을 부숴 그 가루를 뿌려놓은 듯 생기를 머금고 반짝반짝한 빛을 보이는 꽃다발이 처음부터 이렇게 한 쌍으로 존재했던 양 잘 어울렸다.반대쪽 끝에는 오늘 막 꺾어온 꽃을 장식해두었다. 이슬을 머금어 싱그러운 빛과 함께 풀내음이 묻어났다. 이쪽은 이름이 뭐였지. 분명 그 자리에서 물어봤는데 또 잊어버리고 말았다. 꽃이란 게 종류란 얼마나 다양하고 생긴 건 또 얼마나 비슷한지.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아직 멀었다. 이따 또 식물사전을 뒤져봐야지.꽃..

with.루 2018.04.24

봄비

: 루 모겐스 타닥타닥 위에서 아래로,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어딘가 심장박동과 닮아 있었다. 자장가로 삼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리듬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수마에 잠겨 몽롱하던 의식의 한 가운데로 차가운 빗방울이 톡 떨어져 잠을 깨웠다.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이자 곤히 잠든 연인의 얼굴부터 시야에 들어왔다. 온기가 와 닿는 귓가에는 규칙적인 그의 심장박동이, 바깥을 향하는 귓가로는 그 박동을 닮은 빗소리가 들렸다. 조금 몸을 비틀어 창 쪽으로 시선을 움직이자 물방울로 얼룩진 유리 너머가 여전히 먹구름으로 새까매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아직 새벽이겠지, 하고 조금 서늘한 방의 공기로 추측을 해보았다.꿈을 보았던 것 같다. 어떤 꿈인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깨어나기 직전까지도 가슴이, 누군가가..

with.루 2018.04.23

16세 에슬리

: 루 모겐스 대화하고 있던 상대가 갑자기 뒤바뀌는 경험은 쉽게 벌어지지 않는다. 이것도 뭔가 이상? 저번처럼 상자가 열리기라도 했나? 그렇게 의심하며 에슬리 챠콜은 눈앞의 변화에 눈을 깜빡였다. 커다랗고 까만 눈동자가 달라진 상대를 물끄러미 탐색한다. 낯선 것을 앞에 두고 경계하는 야생동물의 표정이었다.“루?”아마도.하지만 그녀가 아는 루는 아니다. 냄새가 달랐다. 그야 생긴 것도 달랐지만. 키는 더 자란 것 같았고 머리는 짧아졌다. 눈은,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색이 빠진 듯─마치 제 머리처럼─한 그의 오른쪽 눈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그는 미래에서 왔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눈앞에 증거가 있으니 에슬리는 믿기로 했다. 대신 그 눈은 어쩌다 그런 거야? 물었지만 대답은 들..

with.루 2018.04.23

상실

: 루 모겐스 ※ 아래의 로그는 인세인 시나리오 낙원(楽園)의 플레이를 바탕으로 한 후기 연성입니다. 원 시나리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시나리오를 알지 못하는 분들은 열람하지 않기를 권장합니다.원문 시나리오 : https://staygold-trpg.stores.jp/items/582f2be7a458c07583005140글 쓸 때 같이 들은 노래 PC1 : 에슬리 챠콜 / PC2 : 루 모겐스 ───어디선가 빗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멍하니 고개를 들자 반사 작용처럼 눈물이 툭, 데구르르 떨어진다. 다시 한 방울, 또 한 방울. 어딘가 몸 안쪽이 고장나버리고 만 것만 같았다. 눈가에 맺힌 눈물 위로 새파란 하늘이 비친다. 덩달아 눈물도 파랗게 물들었다. 하늘은 빌어먹게도 맑았다. 그렇겠지. ..

with.루 2018.04.23

Trust

: 루 모겐스 ※ 아래 로그는 coc 시나리오 In the Cage의 플레이를 바탕으로 한 2차 연성으로 원 시나리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미플레이자는 열람하지 않기를 권합니다.원문 시나리오 : https://www.pixiv.net/novel/show.php?id=7038884 NPC : 루 모겐스 / PC : 에슬리 챠콜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따뜻하게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손에 들었다. 한 모금 차를 마시면서 정말이지, 이상한 꿈이었어. 자연스럽게 그 말이 흘러나왔다. 아직도 손바닥에는 그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잘 먹었어?”“응. 맛있었어, 엄청.”설거지를 마쳤는지 옆으로 같은 찻잔을 들고 그가 앉았다. 이쪽을 향해오는 온화한 시선에 찻잔을 들지 않은..

with.루 2018.04.23

그림의 소녀

: 루 모겐스 1.새벽바람이 스산하게 불어오는 시간이면 오래된 저택의 복도 한편에서 흰 발이 나타났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은 그늘을 벗어남에 따라 나풀거리는 하얀 원피스, 불이 켜진 촛대, 어깨에 닿지 않는 단발머리와 서늘한 무표정까지 찬찬히 형태를 갖추어나갔다. 저택에 사는 이들이라면 익숙한 낡은 그림 속 인물과 꼭 닮은 소녀다.그림 속 소녀는 저택에서 살았던 누군가의 초상화는 아니라고 했다. 어째서 이런 곳에 걸리게 되었는지, 누구를 그런 것인지도 모르는 채 그저 오래도록 복도 한편에 방치되어 왔다. 점차 그 자리에 그림이 걸려 있었다는 것조차 잊혀질 만큼.빈 방이 많은 서관의 복도는 사람들이 잘 오가지 않았다. 덕분에 바닥에 얕은 먼지가 깔려 있기도 빈번했다. 그 위로 맨발의 발자국이 찍히기 ..

with.루 2018.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