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ndes : Prelude 32

030. 인내의 끝

: 마일즈 번 더보기 【대기 모드로 전환합니까? y / n】 기다림이란 익숙하다는 말로 부족한 것이다. 본디, 도구에게 기다린다는 표현은 가당치 않다. 구태여 쓴다면 대기한다고 해야 할까. 연락이 차츰 줄었다. 의무적으로라도 보내오던 메시지는 점점 짧아지고 어색해지고 간격을 벌렸다. 마침내 달을 넘어간 메시지를 두고 안드로이드는 사직을 고민했다. 메시지를 위로 넘긴다. 시시콜콜한 과거가 올라갔다. 그녀는 유머를 아는 안드로이드였으나 손뼉은 한쪽만으로 소리가 나지 않았다. 땅이 마른지 오래다. 그를 살리고 싶었다. 주제넘은 자기만족이었다. 「나를 위해 살아라.」 당신은 지금 누구를 위해 살고 있을까. 「저를 생각해 살아주실 수 있나요?」 나는 앞으로 무엇을 보며 살아야 할까. 전원버튼을 더듬었다. 안드로이..

029. 책임, 선택, 크리스마스의 온실

: 마일즈 번 겨울이 성큼 다가오는 어느 날, 마일즈 번의 연구실로 인부들이 찾아왔다. 공사가 있습니까? 물어보자 별 거 아니란 투로 눈이 내리기 전에 온실을 만들려고. 답이 돌아왔다.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그의 이능력과도 연관 지을 수 있고 늘상 하얀 상자 같은 연구소에 있기보다 한 번씩 온실 산책을 가는 게 무엇보다 몸의 건강에도 정신 건강에도 이로울 것이다. 카르테의 생각을 알았다면 그는 ‘또 노인네 취급이냐?’ 하고 찌푸렸을지 모르나 그녀는 진지하게 증축 계획에 찬성하였다.그곳이 자신을 위한 공간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추호도. 그러나 완성되고 나서 그곳을 가장 많이 방문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였다. 어쩌면 이곳을, 이것들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온실로 발걸음을 옮긴지 한참..

028. 꿈의 기록

: 마일즈 번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잘 주무셨나요? 오늘은 어떤 꿈을 꾸었나요. 어떤 꿈도 꾸지 않았다면 숙면했다는 뜻이군요.인간은 수면 중 수많은 꿈을 꿉니다. 대부분을 무의식의 영역에 넣어두고 기억하지 못하지만요. 꿈이란 무의식에 잠재된 욕망의 반영인 동시에 현실의 경험을 정리하는 과정으로 현실과 환상, 경험과 갈망 사이를 오가며 비선형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꿈을 꾸는 행위를 그래서 저는 지극히 인간다운 행위라 여깁니다.어젯밤 꿈을 꾸었습니다. 바로 앞문단과 모순되는 말이죠. 안드로이드가 꿈을 꾸다니 성립되지 않는 문장이기도 합니다. 안드로이드는 어떤 꿈도 꾸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저의 기록이면서 저의 것이 아니었던 그것을, 꿈을 대신해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요.──..

027. 계약 연애

: 마일즈 번 “손 줘 봐.”“저는 개가 아닙니다, 마스. 안드로이드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ST사의 군용 프로토 타입 안드로이드입니다.”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잖아. 누가 그걸 모르냐. 아니면 그것도 안드로이드식 농담이냐? 소리 대신 눈으로 쏟아지는 말을 읽어내며 카르테는 얌전히 손을 내밀었다. 뻔히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굳이 한 번 더 불필요한 말을 덧붙이는 것은 카르테 또한 그와의 대화를 즐긴다고 해석해도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스스로 말하지 않는 한 마일즈 번이 알아줄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의외로 둔한 면이 있으니 말이다. 혹은 자신이 없는지도 몰랐다. 유독 안드로이드를 대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그였다.아카데미의 정문이었다. 휴일 오전이라 행인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없지도 않았다..

026. If you say……

: 마일즈 번 「날 위해 죽고 싶냐.」───죽을 수 있냐.라고 그는 묻지 않았다. 죽고 싶냐. 그렇게 물었지.카르테는 대답해야 했다.「안드로이드는 의지를 갖지 않습니다. 그러니 명령을.」이것은 반의 정답, 그리고 반의 오답이다. 카르테는 그의 속마음을 알고 있었다.「날 위해 죽고 싶냐.」──아니라고 답해라.「저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답하면 이것은 정답일까.No. 이것은 반도 되지 않는 그저 오답이다.안드로이드는 인간의 욕망을 이루어주어야 한다.안드로이드는 인간을 지켜야 한다.마일즈 번의 물음은 카르테에게 모순을 불러일으켰다. 언젠가의 질문, 나를 죽여라. 그 때와 같은 모순이다. 그를 대신해 죽어야 한다. 카르테가 살길 바라는 그의 욕망을 들어주어야 한다. 모순, 그리고 또 모순. 마일즈 번..

025. 전달, 오렌지, 게임

: 로넨 올가 “전달하기 게임이야, 카르테~!”아하학, 하고 경쾌한 웃음소리가 먹구름을 헤치듯 울려 퍼진다. 카르테는 그저 렌즈를 빙그르르 돌렸다. 그녀의 손은 오렌지를 까고 있었다. 지금이 제철이라고 들었다. 막 봄 비를 집어삼키며 겨우내 언 땅에서 당도를 끌어 모아 주황빛으로 잘 익은 오렌지는 껍질에서부터 달콤한 향을 풍기고 있었다.카르테가 오렌지를 까고 있는 이유는 별다를 게 없었다. 잔뜩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였지. 마을에서 한 궤짝을 사다가 아카데미 앞에 멋대로 둔 사람이. 오렌지의 단 내음은 꽃이 벌을 부르듯 지나가는 이들을 많이도 현혹시켰다. 그러나 오렌지를 까는 일은 제법 수고스러웠다. 단단한 껍질은 귤보다 벗기기 어렵고 자칫하다가 즙이 튀기도 쉬웠다.누가 시킨 것은 아니었다. 다만 ..

024. Who am I …to you.

: 로넨 올가 비가 세차게 부는 밤이었다. 태풍일까. 언제나 완만한 기후일 줄로만 알았던 10섹터에서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들었다.비는 하염없이 내렸다. 창문을 타고 때리는 빗소리가 아카데미 건물 안을 울렸다. 언제나 낮이든 밤이든 떠들썩한 곳이지만 그 날은 기묘할 정도로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아, 그 대신이라는 듯 빗소리가 모든 소리를 삼키고 시끄러움을 대신해주는 것만 같았다.그러다가 한 번 커다랗게, 번개가 내리쳤을까. 갑작스럽게도 아카데미의 모든 전력이 일순 차단되었다 돌아왔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누군가는 전력이 끊긴지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그래서 이변을 알아차리는 것이 늦어졌다.“좋은 아침입니다, 마스터.”“응… 어…?”“비가 그친 다음날은 공기가 더 맑네요. 햇빛은 싫으신가요?”로넨 ..

023. 칼 단발

: 마일즈 번 날을 번뜩이며 날아오는 쇠붙이를 닮은 꼬리는 쳐내기 힘들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쳐낼 수 없다. 지금의 위치와 각도로는. 그렇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것. 계산을 마친 카르테는 공중에 떠오른 몸을 비틀어 조금이라도 방향을 바꾸었다. 일직선으로 뻗어오던 제노의 꼬리는 종이 한 장 차이로 그녀의 머리를 비껴 지났다.피부가 얇게 베이는 감각, 서걱하고 들려오는 소리, 데구르르 굴러가는 톱니바퀴의 머리장식. 허공으로 붉은 머리칼이 나풀나풀 흐트러지는 광경에 아주 잠깐 시선을 둔다. 그러나 금세 어떤 감정도 담지 않은 무기질의 눈동자로 낫을 들어올렸다. 저쪽이 제 머리카락을 잘랐다면 저는 저쪽의 머리를 자를 뿐이었다.임무를 마친 카르테는 바닥에 뿌려진 제 머리칼에 허전해진 목가를 손으로 만졌다. 삐뚤빼..

022. 꽃밭

: 샤오리 구름이 움직인다. 햇살은 각도를 조금 바꾸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것은 코가 아릿할 정도로 짙은 장미 향. 느릿하게 깜빡이는 붉은 눈동자가 눈앞의 풍경을 훑는다. 시야에 가득 들어차는 것은 제 머리색과 꼭 닮은 꽃밭이었다.사시사철 언제 어느 때 와도 시드는 일이 없는 만개한 장미의 향연. 그 한 가운데를 단단한 품에 안겨 거닐었지. 카르테, 이름을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와 따뜻한 품, 시드는 일이 없는 꽃밭처럼 변하지 않을 거라 믿었던 시간이었다.──꽃밭은 변함이 없었다. 그 주인을 잃었음에도. 싱그러운 생을 자랑하며 시간이 멈춰 있었다. 어쩌면 거기서부터 잘못이었다고, 낫을 쥔 손이 가볍게 떨린다. 이조차 그에게 배웠던 것이지. 제가 손에 쥔 것 중에 그를 통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런 상..

021. удовольствие

: 로물루스 볼코프 10초, 목과 다리의 안쪽의 전원을 동시에 누르고 기다리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졌던 몸에 전력이 들어온다. 거기서 다시 기동까지 30초. 들어온 전력을 통해 입력된 데이터를 불러오는 시간, 그리고 자신의 안에 백업된 데이터를 통해 상황을 파악하고 눈앞의 입을 굳게 다문 남자에게 할 말을 고르기까지 20초.1분. 60초. 카운트다운을 마친 ‘카르테’는 초면이면서 초면이 아닌 남자에게 인사를 건넨다.“안녕하세요, 롬. 가위바위보를 할까요?”“……그래, 카르테.”주먹을 흔들자 남자는 잠긴 목소리로 끄덕여왔다. 몇 번째인지 모를 기동을 반복하면서 생긴 불문율이었다. 서로 무엇을 낼지 이제는 외워버린 가위바위보를 한다. 9번의 승부, 6번의 비김, 순서까지도 완벽하게 외워두었다. 그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