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861

46. 아름다운 것, 손에 닿는 것

: 르윈 알렉시아 우주에서 가장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 있다면 혜성이라 답할 것이다─, 라고 누군가 말했었지. 천문학자였나. 스스로를 불태우며 깎아나가면서도 멈추지 않는 빛무리. 꼬리를 길게 빼고 태어나 죽을 때까지 그저 우주를 가로질러 제 궤적을 남기는 아름다운 혜성.아인델은 우주의 이치에 밝지도 않았고 혜성을 보며 뽐낼 대단한 지식이 있지도 않았다. 혜성이 우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말에도 글쎄, 간단히 동의하지 못했다.그녀에겐 더 아름다운 것이 있었다. 손닿지 않는 광활한 우주의 빛이 아니다. 뻗으면 닿을 가까이에 있는 반짝임이다. ──빛나는 것은 아름답지. 그 빛이 손에 잡힌다면 더욱 아름다울 거야. 아인델 아라크네 아스테반은, 트리플에이의 삶은 그러하였다. 아름다운 것이 있으면 손을 뻗었고 그 욕..

소멸, 탄생 2019.10.27

45. 나는 아직 전부의 너를 모르지.

: 후이 이샤오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오른다. 물음표를 따라 섬세한 턱 끝이 기우뚱 기울었다. 어째서 제 옆의 아이가 돌연 이렇게 뻣뻣해져버리고 만 것인지 여기 오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어 봐도 아인델로서는 짐작 가는 일이 없었다.“왜 그러니, 후이?”“아뇨아무것도요영화엄청기대되네요그죠?”그러나 아무리 봐도 기대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기이하다는 그녀의 시선에 후이는 도통 여길 보지 않는 먼 시선으로 어서 자리에 앉자고 재촉만 할 뿐이었다.입구를 나란히 걸었다. 걷는 사이 다시 한 번 추측해보았다. 돌이켜보면 아주 평범한 일과였다. 얼마 전 개봉한 액션 영화의 시사회 초대권이 손에 들어왔고 이 영화를 좋아할 것 같은 인물에게 보러 가겠느냐 연락을 했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종종..

소멸, 탄생 2019.10.08

44. C+

: 장 디뉴엘 “지저분한 얼굴이구나.”꼭두새벽부터 이루어진 회의에서 돌아오자마자 장이 제 파트너에게 들은 첫 마디였다. 장의 얼굴이 단숨에 팍 찌푸려졌다.새벽 순찰조로부터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다는 급작스럽게 호출이 있었다. 덕분에 눈 뜨자마자 면도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아직 꿈나라인 파트너를 내버려 둔 채 가이드 회의를 치르고 돌아온 참이었다. 회의 자체는 순조로웠지만 어떤 변수가 될지 모르는 정보가 또 하나 늘어나는 건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그런데 돌아오자마자 듣는 말이라곤, 겨우 잠을 깨운 듯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던 아인델의 고개가 느긋하게 기울었다. 빈 손이 뻗어와 수염으로 까끌거리는 턱을 더듬었다.“네가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건 드물지 않니.”그야 시국이 어느 때인데, 대외적 이미지..

소멸, 탄생 2019.10.08

더없이 많은 사랑을 내게

: 루 모겐스 *기억해, 루? 그 밤을.나는 아직도 선명히 기억해.그 날이 있고부터 여전히 꿈속에 사는 것처럼.* 그 날은 말이지.하루 종일 엄청 긴장해서, 좀처럼 진정하지 못해서어쩌면 루가 보기에도 이상했을지도 몰라.한편으로는 이상할 만큼 차분하고 덤덤해서,꼭 이미 전부 끝난 것처럼 말야.그래서 오히려 아무렇지 않기도 했던 것 같아.그 날의 내가 루의 눈엔 어떻게 보였을까.평소랑 같았을까? 조금 옛날이야기부터 해보자.좋아한다는 말은 하나도 새삼스러운 게 아니었어. 그야 언제나 루를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동시에 엄청나게 엄청 새삼스러운 말이기도 했어.아무렇지 않게 “나도 좋아해.” 하고 말했지만 내 좋아해는 루의 좋아해와 달랐으니까,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어.루에게 친구로 있겠다고 해놓고 한 순간도 루의 ..

with.루 2019.10.07

살아줘

: 루 모겐스 *주 의* 이어지는 로그는 백결 님의 coc 시나리오 '단 한번의 믿음'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열람에 주의해주세요. * * 이번엔 바라는 대로 되었어?바라던 대로 당신을 봐주었을까?틀리지 않고 나를 위하고 당신을 위하는 선택을. * *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눈발이 날려들었다.“지금부터 루 모겐스를 참수형에 처한다.”피의 향기, 사람들의 절규, 아비규환인 그 사이를 유유히 흩날리는 송이송이 눈발이 펼쳐지는 광경을 꿈결처럼 만든다.「나를 믿어줘서 고마워.」우뚝 선 두 귀의 왼쪽에서는 사명감과 충성으로 뜨거운 목소리가, 다시 오른쪽에서는 마치 영원의 서약이라도 하듯 열없이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디에도 그녀의 의사는 없었다. 재판장에 오른 순간부터 그랬지만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with.루 2019.09.05

목욕 후의 풍경

: 루 모겐스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안쪽을 가득 채웠던 수증기가 넘실넘실 거실로 퍼졌다. 촉촉하고 따뜻한 공기는 소파에 앉아 뒹굴거리던 에슬리에게까지 닿아 자연스럽게 재채기가 나올 듯 코끝을 간질였다.나도 씻어야 하는데……, 생각만 하면서도 소파에 파묻히듯 기댄 자세가 편해 쉽사리 몸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그런 그녀의 눈앞으로 젖은 멍멍이가 지나갔다.정확히는 구부정한 자세로 덥수룩한 머리카락까지 푹 젖어 물기를 뚝뚝 흘리는 거대한 멍멍이, 를 닮은 애인.허리의 끈도 제대로 묶지 않아 아슬아슬한 목욕 가운 한 장만 느슨히 걸치고 카펫 위로 뚝뚝, 제가 어딜 돌아다니는지 발자취를 알리듯 물방울을 떨어트리며 어슬렁어슬렁 걷는 저 사람. 어디로 보나 고의성이 다분했다.그도 그럴 게 어슬렁어슬렁 부엌으로..

with.루 2019.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