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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사비아가 선물해준 작은 바니

: 율릭 함메르쇼이 분홍색과 하얀색으로 포장된 상자를 열었을 때, 안에 들어있던 것은 흰색의 면적이 작은 옷이었다. 옷이라고 해도 될까? 등 부분은 분홍색의 리본으로 코르셋마냥 조이게 되어 있고 앞면은 가슴을 아슬아슬하게 가릴 수준으로 짧은 것이 반질거리고 미끌미끌하다. 아인델이 생전 만져볼 일도 입어볼 일도 없는 것이었다. 그 낯선 옷을 들어 살펴보는 표정은 난감함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크게 표정 변화가 드러날 일 없는 얼굴 위로 머뭇거림이, 이어 난처함이. 매끈한 눈썹을 내 천자를 그리도록 모은 채 아인델은 한참 그 옷을 들고만 있었다.상자의 뚜껑 위에는 압화된 꽃이 자리한 카드가 한 장 올라와 있었다. 사비아가, 아인에게. 선물이에요. 입어주실 거죠? 정말이지, 그 아이는 또 이렇게 곤란한 것..

소멸, 탄생 2019.05.25

36. 너의 이델

: 율릭 함메르쇼이 할 일이 모두 끝났다면, 더 이루어야 할 일이 없다면. ……내게 주어진 이 두 번째 시간은 온전히 네게 쓰고 싶어. 더 이상 누구에게도 나누지 않고 전부를, 나를 바라고 원해준 네게.가져줄 거니? 내 전부. 그건 꼭 고백처럼 들리는 걸.어서 와, 이델. 내 욕망. * * * 한 달 만에 돌아온 집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지나칠 만큼 아무것도. 완벽주의자에 결벽적인 그의 성격을 드러내듯 무엇 하나 자기 자리를 잃은 곳 없는 그 공간은 그럼에도 기묘하게 ‘집’이란 느낌은 사라져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하던 온기가 서린 집(Home)보다는 차라리 박물관이라고 해도 좋을 무미한 것이 되어 있었다.그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만을 선명히 알려주었다. 기억하고 보존하기. 지키며 그리기...

소멸, 탄생 2019.05.23

35. 전하지 않은 말

: 율릭 함메르쇼이 아무에게도 전할 수 없는 말, 전하지 않을 말. 누구도 몰라야 할 말. 그 순간,아주 무서웠어. 광기가 나를 잠식하는 그 순간에 아무도 곁에 없어서. 누구의 소리도 닿지 않아서. 차가워서, 어두워서, 내가 견고할 수 있던 건 나를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이들이 있어서 그랬다는 걸 깨달았어. 홀로 있는 나는 하나도 견고하지 않고 강하지 않아. 두 손으로 스스로를 감싸 안아주는 것조차 못하는 나약하고 형편없는 나였어. 너희와의 모든 실이 끊기고 완벽하게 혼자 남아버린 그 순간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무서웠어.그리고 속상했어. 내 몸인데 내가 제어할 수 없다니. 우습지 않니. 아니, 어쩌면 광기에 젖어 너희를 공격하게 된 순간부터 ‘그것’은 내가 아니었던 거지. ‘그것’에 몸을 빼앗겼다고 해도..

소멸, 탄생 2019.05.16

34. 전하지 못한 말

: 개인 로그 너희가 쓰러트린 건 내가 아니야. 그저 광기에 먹힌 가엾은 크리처였단다.마지막까지 너희를 지켜내서 나는 스스로가 자랑스럽고, 마지막까지 무사했던 너희가 자랑스러워. 고마워. 월터, 마지막까지 너는 무너지지 않았단다. 몰랐니? 내가 네게 많이 의지하고 있던 것을. 네 짐이 무거운데 더는 나눠들지 못하겠구나. 그래도 내 몫까지 너는 더 단단히, 다시금 일어나주렴. 잔뜩 부담을 줄 테니 꺾이고 무너지지 않도록. 선데이, 먼저 쉬고 있을게. 서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라오, 더는 함께 손뼉을 치지 못하지만 마음은 늘 함께할 거란다. 아이나, 네 ‘모두’에 내가 함께한다면 기쁠 거란다. 미카엘, 이미 묻어버린 상냥함을 소중히 해주렴. 네 상냥함도 내가 기억할 테니. 르윈, 응. 내가 멍청이였구나..

소멸, 탄생 2019.05.16

33. 형편없는 기사라 미안해.

: 애쉬 잉그렘 ───어째서 그 순간, 나는 너를 보고 있지 않았을까.네 능력에 잠시 눈이 멀기라도 했던 것 같다. 잿빛의 먼지가루에 잠깐 눈을 떼고 만 것이다. 신기루 같은 그것에 시선을 빼앗길 게 아니라 그 뒤로 홀로 서 있는 널 보았어야 했는데.애쉬. 지켜주지 못한 내 공주님. 네 덕에 나는 또 오명이 늘었단다. 기사 자리는 반납해야겠어. 아카데미 시절, 너를 가까이에서 보기 전까지 너는 내게 그저 ‘유별난 아이’였단다. 언제나 동화책을 품에 안고 다니는 꿈꾸는 아이, 누구에게나 자상하고 상냥한 아이, 모두를 공주님 왕자님으로 부르는 이상한 아이, 아이들에게는 꿈속 이야기를 들려주며 정작 너는 선을 긋는 아이.어째서 너는 한 번도 스스로 공주님이 되지 않았던 걸까.선 같은 건 없다고 했지만 나는 너..

소멸, 탄생 2019.05.16

32. 이제 나를 믿을 수 없어.

: 율릭 함메르쇼이 내가 미쳐버린다면.너희의 믿음을 배신하고 너희를 지키던 거미줄이 너희를 옭아매는 괴물의 것이 되고 만다면,그 때엔 네가 날 쏴주기로 했어.그렇게 말하면서도 내심으론 고개를 저었다. 정말 나쁜 상상이야. 나는 나쁜 상상을 좋아하지 않아. 만약 이것이 나쁜 상상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부디 한 번만 더 나를 믿어줘.──언제나 오만이 나를 고꾸라트린다. 일순 섬광에 눈이 멀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온통 새까만 공간속에서 기이하게 형태가 일그러진 수많은 크리처와 센티넬만이 남아 있었다.이미 한 번 일주일의 기억을 날린 경험이 있다. 그 사이 우리는 낯선 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두 번이라고 어려울 게 없지. 그 자리에 있는 7소대의 센티넬은 서로를 인식하고 대화를 나누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소멸, 탄생 2019.05.16

31. 당연하게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 독고예수 이상이 있었다. 욕망이 있었다. 사람들을 지키는 것, 약자를 돕는 것, 센티넬에게 인간의 이름을 돌려주는 것. 사회를 거슬러서라도 이루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그 일이 쉽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더욱 나는 강하고 흔들림 없이 높은 곳에 가 서야 했다.그곳에 내가 혼자일 줄로 알았다.「센티넬은 인간이야.」네 입에서 나온 말에 그래서 잠시 귀를 의심했었다. 벌써 10년도 전의 일이다.센티넬을 대하는 가이드의 시선은 각양각색이었다. 누군가는 두려워했고 누군가는 혐오했고 누군가는 동정했고 누군가는 특별취급을 했다. 어느 것도 내가 찾던 것이 아니었다.내가 바라는 건 나를 센티넬이 아닌 인간으로 보는 것이었다. 우리가 동등한 인간이길 바랐다. 독고예수. 너는 가이드이면서 센티넬을 인간으로 보아주..

소멸, 탄생 2019.05.16

30. 다만 우리 존재가 불행했을 뿐이야.

: 챙 후이위 * * *어둔 밤이었다. 별도 빛나지 않는 밤인 것만 같았다. 세상이 고요했다. 이곳은 내내 고요했지. 침묵이 불안을 부추기고 마음을 술렁이게 할 만큼. 만들어진 고요였기에 더 불안했는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소리 내는 것들은 언젠가 잡아먹힌다. 우리는 어떤 거대한 포식자의 목구멍 안이었다.「저… 아직 인간인가요?」기분 나쁜 침묵 속에서 네 목소리가 닿았다. 불안하고 흔들리는. 괜찮은 척조차 할 수 없이 겁을 집어먹었던 목소리.「챙. 내가 네 손을 잡으러 가도 되겠니? 참을 수 있겠어?」네 목소리는 우리에게 계속 닿았는데. 내 말은 네게 닿았을지 모르겠다. 할 수 있다면 다가가 네 손을 잡고 싶었다. 너는 상냥하고 겁이 많으면서도 잘 참을 줄 아는 아이니까. 손잡길 두려워하면서도 잡고 싶어 ..

소멸, 탄생 2019.05.16

29. 율릭 함메르쇼이

: 율릭 함메르쇼이 “나는 너를 쏠 거야, 이델.” 만일 내가 광기에 젖어,내가 나로 있을 수 없게 된다면.그 때는, 네가 쏘렴.네 손으로 해줘. 상처입어야 한다면.하지만 그 전에 한 번만 더 날 믿어달라고,욕심을 부려도 될까. *부러 입에 올리지 않아도 알고 있던 사실이다.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그게 내가 아는 율릭 함메르쇼이란 사람인걸. 그렇지만 그 말이 네게 잔인할 것 또한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네가 그 말을 하지 않길 바랐다. 그 말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이 너일까 걱정이었다.“율. 나는 너를 상처주고 싶지 않았어.”“하지만 네게 그 말을 하게 함으로써, 결국 상처를 주고 말았구나.”네가 늘 내 곁에서 많은 것을 감내하고 희생하고 나를 위함으로써 네 여러 가지 것들을 놓는 걸 모르지 않..

소멸, 탄생 2019.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