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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좋아해주기만 하면 안 되겠니.

: 장 디뉴엘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그저 좋아해주기만 하면 안 되니?”한 번도 들은 적 없는 말이 소리로 빚어져 흘렀다.무언가를 꾹 참고 있는 낯이었다. 눈썹과 눈썹 사이의 골이 깊었다. 붉게 물든 눈가가 유독 도드라졌다. 온통 하얀 빛인 얼굴이라 더 그랬을까.지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말을 꺼내는 것조차 무거워 입술 사이로 새는 한숨만이 갈 곳 없이 흐트러졌다.순간의 전부가 여름 한낮의 아지랑이 같았다. 아스팔트가 들끓도록 찌는 태양빛 아래 펼쳐지는 풍경이 더없이 비현실적이었다. 흘러가는 장면을 차라리 거짓이나 신기루라고 의심하는 쪽이 합리적일 것이다.작은 손바닥이 뺨에 얹어졌다. 언젠가는 손톱을 세우며 상처입히기에 급급했던 손이, 평균보다 조금 낮은 체온의 손가락이 뺨을, ..

소멸, 탄생 2019.07.24

42. 금빛 맹수의 입안이었다

: 유해리 아인델에게 유해리의 금빛 눈동자는 원석과 같았다. 태양이라기엔 이렇게 날카롭고 갈고 닦이지 않은 자연 본연의 것일 수 없었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손을 올려도 그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것에 손을 다치고 말.그런 유해리의 눈이 제 앞에서는 꼭 이빨을 감춘 야수처럼 순한 빛을 보이는 건 아인델의 소소한 만족 중 하나였다. 이 아이는 맹수지만 나를 물지 않아. 제 앞에 무릎 꿇는 이에게 한없이 자비로운 오만한 여왕은 그래서 유해리라는 맹수의 입안에 손을 집어넣길 주저하는 법이 없었다.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카메라 앞에 선 유해리의 눈은 맹수를, 짐승을, 포식자를 연기하고 있었다. 저를 주인으로 모시던 눈이 이 순간만큼은 깔보는 것 같기도 하고 탐욕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어찌 됐건 그녀에게서 ..

소멸, 탄생 2019.07.24

38 알라딘과 자스민

: 아케치 요아케 그 분은 꼭 마법처럼, 기적처럼, 신비롭게 제 눈앞에 나타나셨어요.성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본 적 없는 공주님은 두 손을 모은 채 여전히 꿈속에 잠긴 듯 눈을 감았어요.그리고 이제까지 제가 지낸 세계가 얼마나 상자 속이었는지를 가르쳐주셨죠.지금 눈앞에 있는 건 공주님을 마법처럼, 기적처럼, 환상의 세계로 데려가준 도둑 친구가 아니라 갑자기 사라진 공주님을 찾느라 혼비백산해 화가 났던 궁전 사람들인데 말이죠.뒤늦게 감았던 눈을 뜨고 화난 사람들을 본 공주님은 몇 번이고 빼꼼빼곰 고개를 숙여가며 다시는 말도 없이 나가지 않겠다고 사과를 해야 했어요.그녀의 멋진 도둑 친구가 그 광경을 보았다면 “세이라, 또 별 거 아닌 일로 사과하고 있지 않아?” 하고 고개를 들게 해주었겠죠.방으로 돌아온..

41. 梅雨

: 니케 송이송이의 붉은 꽃이 모두 떨어지고 꽃가지 끝에서 동그란 과실이 맺혔다. 봄이 지났다는 신호였다. 그리고 다시 알을 키운 과실 위로 지치지도 않는 듯 이슬비가 떨어졌다. 가느다란 빗줄기는 끊어질 듯 끊어지는 일이 없이 온종일 맺힌 열매와 잎과 가지를 적시고 땅으로 스며 진창을 만들었다. 이 비가 모두 그칠 즈음이면 매실이 익을 것이었다.츠유梅雨의 계절이었다.지구에 비해 한참 작은 행성이었지만 메데이아에도 사계절이란 것이 있었고 장마의 계절 또한 있었다. 이 작은 행성에 장마 시기의 양상 또한 지역별로 조금씩 달라졌다. 어느 지역은 마치 빗소리가 북을 때리는 것처럼 시끄럽고 요란하게, 무수히 많은 화살이 쏟아지는 것처럼 따갑고 매섭게 쏟아진다던가.그러나 이 지역의 장마는 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흘러..

소멸, 탄생 2019.07.12

#8

: 앙헬 서머즈 ◆ ◆ ◆ 맴- 맴- 맴-뜨겁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 꽃잎이 녹아내리는 냄새를 맡았다. 카밀라에게는 낯선 여름의 향기였다.“잘 따라오고 있냐?”메아리치며 들려오는 매미의 울음소리, 어느 한구석 부족한 곳 없이 작렬하는 금빛 태양, 태양빛 아래로 살랑살랑 봉오리를 활짝 연 색색의 꽃들, 꽃향기를 가득 안고 스쳐 지나는 여름 바람, 바람을 따라 고개를 움직이면 보이는 뭉게구름, 하얀 구름을 배경으로 앞서 걷는, ……당신.모든 것이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콘크리트 바닥을 구경하던 기억이 있다. 거대하고 높다란 건물의 옥상에서, 쏟아지는 빛을 피할 구석 하나 없이 그저 넓기만 하던 방수칠 된 녹색의 바닥 위에 쪼그려 앉아 일렁일렁 춤을 추며 피어오르던 열기를 구경했었다.녹아내릴 ..

Project : JOKER 2019.07.12

#7

: 앙헬 서머즈 ──와아.당신은 웃기도 하는 사람이구나. 내내 찡그리거나 뚱하거나 무표정하거나 아무튼 기분 나빠 보이는 얼굴만 본 것 같은데. 덕분에 처음엔 잔뜩 눈치를 보았다. 지금이라면 그저 그렇게 타고난 얼굴이라고 알게 되었지만.미소라고 해도 될까. 살짝 당겨진 입꼬리를 응시하며 저는 이미 얼굴가죽이 그렇게 되먹은 게 아닌가 싶은 환한 미소를 보인다. 습관이고 버릇이고 스위치를 누르면 나오는 싸구려 복사기의 사진 같기도 했다.당신의 표정을 따라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 제 얼굴을 이리저리 만진다. 이것도 뭐든에 속할까요? 제가 할 수 있는?-뭐든 할 수 있잖냐.저의 무얼 보고 그런 말이 나온 걸까. 아니면 뭐든이란 게 그렇게 쉬운 걸까. 뭐든 할 수 있어요? 그 뭐든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뭐..

Project : JOKER 2019.07.12

#6

: 앨런 루즈 조용한 시간이었다. 목소리가 하나 줄었을 뿐인데 누군가 공간에 음소거라도 한 듯 조용해진 시간이었다. 그야 그렇겠지. 이 상황에서 웃고 떠드는 쪽이 ‘이상할’ 것이다.하지만 당신은 이런 분위기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아요, 앨런 씨.그가 자신의 몸에 운명을 봉인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두 가지 모순된 반응이 들었다. 하나는 역시 당신이 그럴 줄 알았어요. 또 하나는 당신은 그러지 않을 줄 알았는데.자기희생적인 면이 있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정말로 제 몸을 갉아먹을 짓은 하지 않는 요령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당신이 그렇게까지 한 것은 아마도 ‘나는 괜찮아’, ‘아직은 괜찮아’, 그 마지노선이 있었기 때문이겠지.그러나 100%는 아닌, 당신 또한 도박이었을.“바보 같아요, 앨런 씨. 당신은..

Project : JOKER 2019.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