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861

800년 후의 당신에게

: 아니카 와일리 무거운 공기가 감도는 공간이었다. 무겁고 정결한, 지나치게 깨끗한 나머지 부담스러울 만큼 신성한 공기로 채워진 공간은 숨을 쉰다는 당연한 행위조차 불편하게 만들었다. 목 끝까지 채워두었던 제복을 느슨하게 풀며 에슬리는 어깨를 휘휘 움직였다. 찌뿌듯해. 이럴 거면 변이종 상대가 백배는 쉽지.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번에 그녀가 의뢰 받은 일은 고대 유적의 탐사였다. 비공식적으로는 트레저 헌터니 모험가니 멋대로 돌아다니지만 공식적으로는 국가의 허락 없이 출입이 제한되어버린 거대한 신성의 장(場) 테힐라. 그 중에서도 천 년도 전에 세워졌다는 유적지를 목적지로 했다. 최근 그 주변에 이상한 기운이 감돈다고 했던가. 그 심상치 않은 기운을 파헤치는 게 이번 탐사의 목적이고 그를 위한 파티를 꾸리는 ..

심연의 서막 2018.05.25

해질녘 너머, 별이 빛나는 우리의 밤

: 루 모겐스 ※ 이하의 글은 오퓸님의 coc 시나리오 「해질녘과 저무는 너」의 플레이를 바탕으로 쓰였으며 해당 시나리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열람에 주의해주세요. ※원문 시나리오 : https://opium-poppy.postype.com/post/1686187 “…있잖아, 에슬리.”붉은 태양을 등지고 그가 이쪽을 돌아본다. 그의 웃는 얼굴은 익숙하고 익숙한 만큼 그녀에게 안도를 주는 것이었지만 이 때의 미소는 그렇지 못했다. 어떤 미소였을까. 슬픈 것 같기도 하고 후련한 것 같기도 하고, 중요한 건 내뱉을 뒷말에 그녀는 고려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나를 죽여줄래?”봐. 그렇지?아연한 그녀와 그의 사이를 비집고 바람이 한 줄 불었다. 온화한 봄이라고 여긴 계절이 돌연 한없이 잔혹하고 스산..

with.루 2018.05.18

어린이날

: 루 모겐스 “에슬리랑 놀고 싶어! 에슬리가 안아주고 책 읽어줬으면 좋겠어~!”말의 머리에도 꼬리에도 하트가 뿅뿅 달라붙어서는 날아올 것만 같다. 배후로는 꽃과 반짝이도 보일 것 같은데……, 이럴 때면 새삼스럽게 어디서 이런 뻔뻔함이 나오는 건가 싶다.새삼스럽게 놀라지는 않았다. 자기보다 4살 위의 연인이 갑자기 제 키의 반 토막 수준의 꼬마로 변해버리는 것도, 부끄러움도 없이 그 얼굴을 이용해 순진한 어린아이인 척 구는 것도. 그가 표정만으로 그녀를 궁지에 모는 일이야 곧잘 있는 일이었고, 이미 한 번 몸은 그대로인 채 정신만 어린아이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 그 반대라고 없을 건 없지.“정말~ 안 통해? 으응? 에슬리?”“……하아.”없을 건 없지만── 그렇다고 꼬마의 위로 연상의 연인의 얼굴이 겹쳐 ..

with.루 2018.05.07

영원 대신

: 루 모겐스 밤이 내려앉은 배경을 바탕으로 창가에 두 개의 꽃병이 놓여 있다. 한쪽 꽃병 안을 채운 건 물안개가 떠오르는 옅은 청회색의 안개꽃, 그리고 사이로 해님처럼 노랗게 피어 있는 민들레, 한 자리에 모여서 피기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 것 같았지만 꼭 그 위로 햇살을 부숴 그 가루를 뿌려놓은 듯 생기를 머금고 반짝반짝한 빛을 보이는 꽃다발이 처음부터 이렇게 한 쌍으로 존재했던 양 잘 어울렸다.반대쪽 끝에는 오늘 막 꺾어온 꽃을 장식해두었다. 이슬을 머금어 싱그러운 빛과 함께 풀내음이 묻어났다. 이쪽은 이름이 뭐였지. 분명 그 자리에서 물어봤는데 또 잊어버리고 말았다. 꽃이란 게 종류란 얼마나 다양하고 생긴 건 또 얼마나 비슷한지.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아직 멀었다. 이따 또 식물사전을 뒤져봐야지.꽃..

with.루 2018.04.24

025. 전달, 오렌지, 게임

: 로넨 올가 “전달하기 게임이야, 카르테~!”아하학, 하고 경쾌한 웃음소리가 먹구름을 헤치듯 울려 퍼진다. 카르테는 그저 렌즈를 빙그르르 돌렸다. 그녀의 손은 오렌지를 까고 있었다. 지금이 제철이라고 들었다. 막 봄 비를 집어삼키며 겨우내 언 땅에서 당도를 끌어 모아 주황빛으로 잘 익은 오렌지는 껍질에서부터 달콤한 향을 풍기고 있었다.카르테가 오렌지를 까고 있는 이유는 별다를 게 없었다. 잔뜩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였지. 마을에서 한 궤짝을 사다가 아카데미 앞에 멋대로 둔 사람이. 오렌지의 단 내음은 꽃이 벌을 부르듯 지나가는 이들을 많이도 현혹시켰다. 그러나 오렌지를 까는 일은 제법 수고스러웠다. 단단한 껍질은 귤보다 벗기기 어렵고 자칫하다가 즙이 튀기도 쉬웠다.누가 시킨 것은 아니었다. 다만 ..

024. Who am I …to you.

: 로넨 올가 비가 세차게 부는 밤이었다. 태풍일까. 언제나 완만한 기후일 줄로만 알았던 10섹터에서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들었다.비는 하염없이 내렸다. 창문을 타고 때리는 빗소리가 아카데미 건물 안을 울렸다. 언제나 낮이든 밤이든 떠들썩한 곳이지만 그 날은 기묘할 정도로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아, 그 대신이라는 듯 빗소리가 모든 소리를 삼키고 시끄러움을 대신해주는 것만 같았다.그러다가 한 번 커다랗게, 번개가 내리쳤을까. 갑작스럽게도 아카데미의 모든 전력이 일순 차단되었다 돌아왔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누군가는 전력이 끊긴지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그래서 이변을 알아차리는 것이 늦어졌다.“좋은 아침입니다, 마스터.”“응… 어…?”“비가 그친 다음날은 공기가 더 맑네요. 햇빛은 싫으신가요?”로넨 ..

023. 칼 단발

: 마일즈 번 날을 번뜩이며 날아오는 쇠붙이를 닮은 꼬리는 쳐내기 힘들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쳐낼 수 없다. 지금의 위치와 각도로는. 그렇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것. 계산을 마친 카르테는 공중에 떠오른 몸을 비틀어 조금이라도 방향을 바꾸었다. 일직선으로 뻗어오던 제노의 꼬리는 종이 한 장 차이로 그녀의 머리를 비껴 지났다.피부가 얇게 베이는 감각, 서걱하고 들려오는 소리, 데구르르 굴러가는 톱니바퀴의 머리장식. 허공으로 붉은 머리칼이 나풀나풀 흐트러지는 광경에 아주 잠깐 시선을 둔다. 그러나 금세 어떤 감정도 담지 않은 무기질의 눈동자로 낫을 들어올렸다. 저쪽이 제 머리카락을 잘랐다면 저는 저쪽의 머리를 자를 뿐이었다.임무를 마친 카르테는 바닥에 뿌려진 제 머리칼에 허전해진 목가를 손으로 만졌다. 삐뚤빼..

022. 꽃밭

: 샤오리 구름이 움직인다. 햇살은 각도를 조금 바꾸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것은 코가 아릿할 정도로 짙은 장미 향. 느릿하게 깜빡이는 붉은 눈동자가 눈앞의 풍경을 훑는다. 시야에 가득 들어차는 것은 제 머리색과 꼭 닮은 꽃밭이었다.사시사철 언제 어느 때 와도 시드는 일이 없는 만개한 장미의 향연. 그 한 가운데를 단단한 품에 안겨 거닐었지. 카르테, 이름을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와 따뜻한 품, 시드는 일이 없는 꽃밭처럼 변하지 않을 거라 믿었던 시간이었다.──꽃밭은 변함이 없었다. 그 주인을 잃었음에도. 싱그러운 생을 자랑하며 시간이 멈춰 있었다. 어쩌면 거기서부터 잘못이었다고, 낫을 쥔 손이 가볍게 떨린다. 이조차 그에게 배웠던 것이지. 제가 손에 쥔 것 중에 그를 통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런 상..

021. удовольствие

: 로물루스 볼코프 10초, 목과 다리의 안쪽의 전원을 동시에 누르고 기다리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졌던 몸에 전력이 들어온다. 거기서 다시 기동까지 30초. 들어온 전력을 통해 입력된 데이터를 불러오는 시간, 그리고 자신의 안에 백업된 데이터를 통해 상황을 파악하고 눈앞의 입을 굳게 다문 남자에게 할 말을 고르기까지 20초.1분. 60초. 카운트다운을 마친 ‘카르테’는 초면이면서 초면이 아닌 남자에게 인사를 건넨다.“안녕하세요, 롬. 가위바위보를 할까요?”“……그래, 카르테.”주먹을 흔들자 남자는 잠긴 목소리로 끄덕여왔다. 몇 번째인지 모를 기동을 반복하면서 생긴 불문율이었다. 서로 무엇을 낼지 이제는 외워버린 가위바위보를 한다. 9번의 승부, 6번의 비김, 순서까지도 완벽하게 외워두었다. 그러..

020. Hello, World.

: 로넨 올가 인공두뇌를 연결한 회로가 불타는 것만 같았다. 신경 회로에 벌레가 숨어든 듯 타닥타닥하고 타들어가, 사납게 갉작거리는 소리가 청각센서까지 닿을 것만 같았다. 뜨거워. 반사적으로 눈을 깜빡거린다. 메마른 눈동자는 평소와 다르지 않게 작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기묘하리만큼 세상이 일그러진 것처럼 보였다.경고. 경고. 경고. 경고. 내부의 열이 적정 온도를 넘어 상승 중입니다. 인지 시스템의 과부하를 감지. 위험. 위험. 위험. 위험. 지금 당장 시스템을 차단하고 휴식을 권장합니다.끼긱, 끼기긱, 기긱, 긱, 원을 그리는 눈동자가 반시계방향으로 회전한다. 브레이크를 잃은 열차처럼 사납게, 혹은 위태롭게. 눈앞이 번쩍번쩍 붉게 물든다. 고열로 인해 버벅거리는 시스템을 그러나 차단하기에 앞서 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