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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 기원

: 카인 “네. 저는 카르테입니다.”들려오는 목소리에 가만히 답한다. 1년을 머지않게 남겨두고, 그것은 이제 완전히 제 이름이었다. 입력은 어렵지 않았다. 그저 한 마디, 앞으로 이게 네 이름이야. 그것만으로 식별번호로 구분되던, 하지만 굳이 개체로서의 의미를 갖지 않던 붉은 안드로이드는 개인이 되었다.「내 이름, 은……」이름이란 한 존재를 하나의 개념으로 만드는 최초의 시도다. 카르테, 그녀가 「기록」이라는 의미로 새롭게 개념 지어진 것과 같이. 카인, 그의 이름이 그의 삶처럼 창을 상징하는 것과 같이.「카인이란 이름은 구세계의 성서에 등장합니다. 강한 자를 가리키죠.」언젠가 그에게 이름에 대해 설명해준 적이 있었다. 성서 속의 장자, 그리고 인류 최초의 살인자. 비록 성서 속 인물은 받아주던 사회에서..

018. 숲의 기록

: 벤자민 “약속이야. 엘번의 숲에 걸고 약속해야 해.”눈앞에는 불안을 내비치는 아이가 있었다. 단단히 잡은 손, 흐느낌과 같이 더듬거리며 들려오는 목소리, 고개 숙인 아래로 보이고 있을 표정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몇 번이나 보았던 것이니까.「베니, 출격 준비 완료다.」그의 말에선 어린 아이 같은 인상을 받곤 했다. 커다란 어린 아이. 천진하진 않았지만 어딘지 무구한 눈동자는 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느라 바쁘게 움직였고 경험을 늘려갈 때마다 오색으로 빛을 보였다. 하나, 또 하나, 못 보던 것을 손에 쥐고 낯선 것을 익혀가며 아이는 금세 자란다는 말을 증명하듯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보였다.인간의 성장은 늘 빠르군요. 그 모습을 기록하는 건 어디까지나 제 의무감 같은 것이었지만, 거기서 그치지..

017. 기억의 파편, 셋.

─워프 게이트를 지나자 익숙한 공기가 닿아온다. 인간식으로 표현하자면 폐부까지 얼릴 것 같은 차가운, 날카롭고 싸늘한 1섹터의 공기다.1섹터, 그 중에서도 그녀가 머무는 지역의 공기는 산업단지의 영향인지 삭막한 느낌이 들곤 했다. 곳곳에 늘어선 공장, 쇠와 마른 흙의 냄새, 조금 벗어나면 바다가 펼쳐져 짠 내음을 맡을 수 있었지만 기계에게 물은, 하물며 해수는 기피 대상으로 구태여 오염된 바다 냄새를 찾아 항구까지 향한 적은 없었다.그럴 자유도 갖지 않았지만.그러나 이번에 향할 곳은 산업단지가 있는 서쪽 지구가 아니라 수도다. 워프 게이트를 통과한 카르테, 카타르시스,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한 동행 안드로이드까지 셋은 그곳에서 곧장 차를 타고 1섹터의 중심지로 이동하였다.검은 탑이 가운데 우뚝 선 1섹..

016. What is not given to Android?

: 슈마커 크로넨보그 《warning》 《warning》 《warning》 《warning》 《warning》 《warning》 《war………【접근 불가 항목에의 접근을 확인.】【 는 열람이 불가합니다.】【 】・・・→안드로이드는 감정을 느끼는가?“…그러니까 정리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감정」을 말입니다.” : Yes. →안드로이드 카르테는 감정을 느끼는가? →느낀다면, 감정의 이름은? 눈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안드로이드를 카르테는 기묘한 눈으로 응시하였다.이 안드로이드는 눈물을 흘리는 기능이 있다.너를 만든 창조주의 취향이었을까.이 안드로이드는 감정을 느낀다고 말한다.누가 너에게 감정을 허락하였을까.봇물 터지듯 두서없는 말들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무섭다. 두렵다. 소중하다. 때문에 잃는 것을 견딜 ..

015. 「안드로이드답게」

: 슈마커 크로넨보그 「신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카르테 님. 자유 의지야 말로 우리와 제일 동떨어진 개념이잖습니까?」「안드로이드에게 ‘자유 의지’라니요. 그건 여전히 저희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판단합니다.」그렇지. 네가 알고 내가 아는 것처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그럼에도 때로 기묘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를 찾아 기록을 불러온다. 네가 보는 나 또한 기묘할 때가 있을까? 스스로를 객관화 하지 못해 타인의 시선을 궁금해 하는 것은 성능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었지만, 「좀 더 불러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슈마커. 내. 아들.」그 때의 네 표정을 되감는다. 이마를 두드리던 손길. 도출해내지 못하던 답.→안드로이드는 감정을 느끼는가?카르테는 그 물음에 침묵으로 답한다. “──뭐, 그거야 친구니까..

014. 스터디

: 마일즈 번 볕이 잘 드는 창가 자리였다. 천장에 닿을 듯 창문은 위로 길게 뻗어 있었고 들어오는 햇빛이 도서실 안을 환하게 하였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책에 빛이 닿아 변색되는 일을 방지하도록 햇빛도 조명도 줄여두었지만 입구 쪽이라면 도서실보다는 독서실에 가깝도록 꾸며져 있다.카르테는 막 입구를 지나 약속 장소로 향하였다. 자리에는 이미 두꺼운 책 한 권을 열중해서 읽고 있는 마일즈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마스. 몇 번 불러본 적 없는 호칭에 열중하는 줄 알았던 그가 금방 책에서 눈을 뗀다.“어, 왔냐?”“마스가 지금 넘긴 페이지 수로 보아 약 1시간 20분 전에 먼저 와 있었을 것으로 추정, 저는 약속 시간에 늦었습니까?”책을 향하고 있을 때만 해도 심드렁함에 가깝던 그의 표정은 그녀의 말에 익숙하..

013. 기억의 파편, 둘

ー드물게 구름 한 점 없이 태양이 오래 머무르는 날이면, 빌딩으로 이루어진 숲에 커다란 새가 뜬다.부정, 새가 아니다. 안드로이드다.모델명 ST-C-FM. ST에서 개발하고 출시한 C모델 중 개체 수가 특히 적은 비행 모델이다. 그 중에서도 식별코드 1502로 지칭되는 안드로이드였다.그것이 날씨가 맑은 날이면 장시간 비행을 한다는 건 이 근방에서는 잘 알려진 일이었다. 한 차례의 멸망을 겪은 후 비행기를 찾아볼 수 없게 된 하늘을 날아다니는 건 새나 나비 따위의 자연물이 전부였고 특히나 이곳, 1섹터의 산업단지에서는 그것들조차 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비행을 하는 안드로이드는 자연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식별코드 ST-C-2908LZ, 같은 회사의 전투형 모델 중 하나인 붉은 안드로이드는 광합성을 위해 회..

012. 예비 부품

: 에단 「인류에게 돌아가는 헌신의 손해다 이 말씀이야. 알아듣겠냐?」눈앞에는 무엇 때문인지 많이 화가 난 것 같은 소년이 있었다. 그리고 카르테는 그의 말에 적절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그 정도 손해는 괜찮지 않습니까?「저는 인류에 헌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안드로이드입니다. 인류의 영광, 인류의 발전, 앞으로도 이 땅에서 살아나갈 인류의 번영에 기여하고 봉사하는 것이 저의 존재 의의이며 가치입니다.」그 말에 거짓은 없었다. 눈을 뜬 순간부터 카르테는, 아니. ST-C-2908LZ는 새가 나는 법을 익히듯, 물고기가 헤엄치는 법을 익히듯 자연스럽게, 아니지, 이런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까. 비디오를 재생하듯, 오븐의 타이머를 돌리듯 입력된 답에 따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인식했다. 눈을 뜬 안드로..

011. 긴급 점검

풍덩, 누군가 호수에 빠지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누구? 에단? 왜 안 나오지, 저 녀석? 호수가 잔잔한데? 그 목소리들을 들으며 카르테는 호수 바로 앞까지 달려왔다. 에단이 호수에 빠지게 된 직접적인 경위는 들었다─체이서의 케이크를 피해서, 라고 했나─. 거기에 카르테의 책임은 없다. 그러나.「아무리 팔을 이어붙이고 기계를 고쳐도 이후에 재활까지 신경 써야한다는 거 알아 몰라! 모르면 지금 알고!」“에단의 입수 시발점으로서 책임을 느낍니다. 구조합니다.”한 번 더 풍덩, 호수에 물보라가 일어났다.폭설이 내린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겨울이었다. 며칠 전에는 호수 가장자리가 얼 만큼 기온이 떨어지기도 했다. 이런 날씨는 호수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쇼크사를 일으킬 수 있다. 카르테는 그를 ..

010. 기억의 파편, 하나

【데이터 정리에 들어갑니다.】・・・「얘.」ST-C-2908LZ의 통상 업무는 서류 작업이다.「거기 얘.」휴전 전까지만 해도 통상 업무라 함은 최전선에 나가 제노나 돌연변이 등과 전투를 벌이는 일이었지만 대침묵, 이어 휴전, 가동 중지,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ST-C-2908LZ는 『평화로운 세계』란 곳에 떨어지게 되었다.「거기 빨간 애.」「? 부르셨습니까.」「응, 그래. 너 말야. 잠깐 이리 와 봐.」고작 5년, 하지만 그 사이 세상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ST-C-2908LZ는 회사의 재산이 아닌 직원으로 등록되었고 손목에는 섹터의 거주민이란 증명증을 차게 되었다. 전투에 나가는 대신 책상 앞에 앉아 서류 작업을 하고 때때로 출장을 다녀왔다.「이거 먹어볼래?」눈앞에 내밀어진 것은 가운데 구멍이 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