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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0.06. 가을바람의 꿈 飋夢 1

ㅡ부화로그 더보기 바람 한 번 불 때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계절, 쌓인 낙엽 더미 아래로 새 생명이 움트기 위해 땅도 쉬어가는 이 시기를 능란은 제법 좋아했다. 뭐니 뭐니 해도 버섯이 맛있기도 하고, 이 뒤에 찾아올 침묵하는 겨울까지 식량을 잔뜩 비축해두는 일이 즐거웠다. 이런 시기에 맡게 되는 알이라니, 능란 자신이 생명을 덮는 낙엽 더미처럼 따뜻하게 품어줘야 하겠다는 책임감이 더 들 법도 하다. “충분히 고민하고 결정한 것 같으니까 믿고 맡겨보도록 할게. 어떤 아이가 태어나더라도 예뻐해 줄 수 있다고 했지?” “어떤 아이든 듬뿍 사랑해주도록 할게.” 부화기에 소중히 넣어진 알을 품에 받아 들고 능란은 힐쭉 웃었다. 알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텐트로 돌아오자 어느새 셋으로 늘어버린 포켓몬들..

013) 10.05. 낭만을 아는 이에게

ㅡ슈가 귀하 더보기 현실성 없는 낭만과 현실성 없는 허세에는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을까. 여자는 허풍이 심했다. 어떨 땐 모두가 깜빡 속아 넘어가도록 그럴듯한 허풍을 보였고 어떨 땐 듣자마자 ‘누가 거기에 속겠냐.’고 핀잔을 들을만한 소리를 했는데, 그렇게 핀잔이 날아오면 으핫, 웃으며 어수룩하게 상대에게 자신을 낮춰주는 게 요령이었다. 언제부터 이런 요령이 늘기 시작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제 앞의 소녀가 속삭이는,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낭만과는 아무래도 다르기만 했다. “응. 그러니까……” 꽃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한 차례 가을비가 지나고 기온이 뚝 떨어지거든 새벽 서리를 견디지 못하고 얼어 툭, 툭 부서질지도 모를 나약한 생명들, 그것들이 올해의 마지막 향기를 내뿜으며 한낮의 태양 아래서 아름다..

012) 10.03. 매듭, 자격, 증명

ㅡ이치이 귀하 더보기 「매번 감사함다. 4대째명가원조할머니손맛 만파식적입니다!」 「4대 전에는 뭘 하고 있었는데?」 「글쎄, 봉술 도장이 아니었을까 싶단 말이지.」 「그럼 이 다음 5대째는 너야?」 「그건…… 또 모를 일!」 물론 도화무늬 기와집과 백산흑수 가문을 납작하게 치환시킬 수야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능성이란 게 그렇다, 어디로든 열어두어야지 않겠어? 적어도 이곳 캠프에서는 그랬다. 도전하고자 한다면 무엇이든 해도 좋았다.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일촉즉발을 겪고 있었다. “소년, 백산흑수회의 사람인가.” 그전까지도 내내 험상궂게 짓던 표정이 순식간에 더 구겨지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조차 잠깐이었다. 호흡 한 번이 지나간 뒤로 그는 도리어 이제껏 덮어쓴 모든 꺼풀을 집어던지..

011) 10.02. 감사

ㅡ툰 귀하 더보기 차롱숲을 벗어나 숙소로, 숙소에서 다시 꽃가람숲을 가로질러 걸었다. 늘봄 한켠에 다소곳하게 자리 잡은 대나무숲도 부란다를 필두로 한 판짱과 다양한 포켓몬들의 생태가 풍부하게 펼쳐져 있었지만 다님길의 다수 면적을 차지한 꽃가람숲은 규모부터가 달랐다. 는개까지 향하는 길의 주변으로 울창하게 자란 숲은 인도가 닦인 인근은 온순하고 위협적이지 않은 포켓몬이 주로 다녔으나 조금만 민가를 벗어나도 부란다가 우스운 다양한 타입의 포켓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막 여행을 떠나는 트레이너에게는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가졌다고 하겠다. 이름도 어여쁜 꽃가람숲의 이명이 괜히 미아의 숲인 것은 아니었다. 그 길을, 심지어는 사람들이 왕래하는 도로도 아닌 산길로 걸으려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걷는 내내 능란은..

010) 09.30. 유구무언

ㅡ개인 로그 더보기 “나는 포켓몬 마스터가 될 거야!” “──엥?” “……은 농담, 으하핫. 그래도 한 번쯤 말해보고 싶었어.” “첫 배지라고 너무 기고만장해진 거 아니냐니깐. 바보 수.” “좀 좋아할 수도 있지. 그러는 란아, 넌? 이번엔 잘 안 됐지만……” ──금세 따라올 거지? ‘금세’, 지금 바로. 今時에가 줄어든 말로 금방이나 대번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4년쯤 지난 시간은 ‘금세’라고 할 수 있을까? 없다면, 능란의 자격은 어쩌면 일찍이 박탈된 지 오래인지도 모른다. 울창한 죽림 너머로는 포켓몬 배틀의 열기가 뜨거웠다. 쌀쌀해지는 가을 밤바람이 순식간에 익어버릴 정도다. 근성과 기백이 가득하다. 사람들의 환호와 탄식이 번갈아 나올 때마다 능란은 저도 모르게 목을 길게 빼다가 되돌렸다. 저 역시 ..

009) 09.30. 무근성 : 늘봄체육관 도전

ㅡ늘봄체육관 더보기 「Q. 능란 씨는 트레이너 캠프에 왜 왔어요?」 A1. 모모와 친해지고 싶어서~ 아직 이 녀석과 만난 지 얼마 안 됐거든. A2. 그러는 김에 아마추어 배지라도 하나 따볼까. 배지 하나쯤 있어야 친해진 것 같잖아. A3. 사실 예전에 도전했다가 번번이 지기만 해서~ 이번에야말로 따고 싶다는 거야. A4. 그런데 정말은…… ……왜 온 걸까? 이럴 거면. 【마음을 좀 더 강하게 먹도록 하세요. 진달래 씨를 이기고 오시라구요.】 팟, 하고 체육관 사방으로 조명이 켜진다. 차롱숲을 등진 문이 열리자 안쪽에서 짐 리더인 진달래가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이번 도전자를 기억하고 있을까? 그야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겠지. 누가 2년이 넘도록 지긋지긋하게 아침밥 먹듯 도장 문턱을 넘나들었을까. ..

008) 09.30. 죽순 도둑을 쫓아내자

ㅡ늘봄마을 아르바이트 더보기 트레이너 캠프에 참여하기로 한 이상 모두가 공평한 출발선에서! 이런 모토를 따라 능란은 자신의 비상금 주머니를 집에 잘 두고 와야 했다. 몇 년을 소중히 모은 돈은 만의 하나 가족에게 들키지 않도록 집 뒤로 이어지는 또박산 돌무덤 어딘가에 숨겨놓았으니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대신 캠프에서는 캠프만의 재화를 통해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고 이 재화는 다시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마을의 일손을 돕는 형식으로 보충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게 꼭 농번기의 품앗이 같아서 능란은 이 제도가 마음에 든 중이다. 과연 수리 박사, 화랑 토박이다운 수단이다. 그러나 첫 마을─엄밀히 말해 푸실은 튜토리얼이지!─부터 떨어진 의뢰가 능란으로선 손 댈 수 없는 것일 줄 몰랐다. “최근에 차롱숲의..

007) 09.28. 수리 박사님의 특훈!! -1-

ㅡ푸실마을 아르바이트 더보기 딩-동, 하고 벨을 누르자 문을 열고 나온 건 사람 대신 던지미였다. 익숙한 녀석에게 인사를 하며 주먹밥 하나를 끼워준다. 그 사이 연구소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던지미─, 손님은 누구지?” 그 말이 허락이라도 된 것처럼 능란은 태연하게 제 집처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요오, 수리 박사님. 연잎버터죽통밥 배달이라고.” “어라, 이번엔 시킨 기억이 없는데…….” 그제야 집주인도 머리를 긁적이며 모습을 드러낸다. 오늘도 어딘지 허술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잘 보면 빈틈 하나 없는 자세인데도 불구하고 느슨한 저 표정 탓인가. 그의 직업이 ‘박사’라고만 생각하는 이들은 아무래도 꾸준히 나왔다. 아니아니, 저 펄럭이는 옷의 안쪽을 주목해보라니까. 역시 박사님도 저번의 정크 트레..

006) 09.26. 방방곡곡 파도치리라

ㅡ라한 귀하 더보기 “그야, 이리도 생생한걸요.” “그거 나 부끄러우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 배경으로 지나가는 무수히 많은 물음표는 대나무통에 쏘옥 넣어버리고 시치미를 뗀다. 아니라면 내가 꼬렛 구멍을 찾든 라한 씨를 얼렁뚱땅 넣어버리든 하는 수밖에 없었을 거야. 애써 괜찮은 척 내려놓은 찻잔을 들었다. 어째 목이 탔다. “걱정할 것 없다고 머리로는 알면서도 왠지 걱정해버리고 싶단 말이지~ 친구란 아무래도 간섭해버리고 싶은 자리인 모양이야.” 슬프게 하려는 게 아니었다는 말도 그렇다. 당신의 본의가 아니어도 속상해지고 마는 건 평온한 얼굴 너머로 어딘지 모르게 당신이 고독해 보인 탓이다. 언젠가 했던 말을 되풀이해보자. 화랑지방은 애향심 깊은 주민들이 많았다. 푸실마을의 도화무늬 기와집이 그랬고 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