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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 10.12. 충만한 애정

ㅡ배배 진화 더보기 화랑지방의 1번을 부여받은 도로는 향수가 느껴지는 느긋한 밭길이 좌우로 펼쳐지는 평화로운 길이었다. 인접해 있는 늘봄마을까지 연결되는 길은 포장조차 되지 않아 흙이 고스란히 보였지만 덕택인지 인간만큼이나 수많은 포켓몬의 발자국이 남기도 하는 곳이었다. 흔히 볼 수 있는 건 역시 다양한 벌레타입과 풀타입 포켓몬, 간혹 꼬렛이나 탐리스처럼 작물을 탐내고 내려오는 녀석도 있었고 가끔 인접한 꽃가람 숲에서 튀어나왔는지 배루키나 이어롤도 보이곤 했다. 대부분이 인간친화적으로 크게 난폭한 녀석은 없었는데 그래도 가끔씩 또박산에서 내려온 링곰이라든지 차롱숲의 부란다가 힘자랑을 해서, 그럴 때면 사람들이 힘을 합쳐 포켓몬을 몰아내기도 했다. 그러면 그제야 조그마한 야생 포켓몬들은 마음을 놓는 것이었..

022) 10.12. 성숙한 인간으로 가는 길

ㅡ마메 귀하 더보기 왜 그랬어? 라는 질문에는 늘 답을 하기 어려웠다. 왜 그랬는지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모든 자신의 마음에, 모든 자신의 행동에 사람들은 모두 명쾌하게 답을 내리고 사는 걸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반대로 어째서 나는 그러지 못하지? 생각의 꼬리는 늘 자기 비하로 치달았다. 왜 그랬어? 그럼에도 다시 한번 그 질문에 답하자면 결국은 도망치기 위함이었다. 저를 쫓아오는 이들을 가장 손쉽게 떨쳐내는 방법만 그 몇 년간 익혔다. 무엇인지 아는가? 쫓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아무런 기대 같은 건 하지 말라고, 나는 응원할 시간이 아까운 사람이라고 스스로의 가치를 땅에 처박는다. ──그래 놓고 사람들이 돌아서면 뒤돌아보고 마는 멍청한 인간. ‘나는 나를 좋아하지..

021) 10.11. 한정 판매!? 이어롭 피규어!

ㅡ는개마을 아르바이트 더보기 또박산에서 돌아온 능란은 소파에 늘어지려는 순간, 저의 포켓몬에게 붙잡혀 억지로 일으켜 서야 했다. 이제 좀 쉬려고 했는데? 억울하게 돌아보면 어느새 길쭉이 자란 빼미스로우가 부리로 무언가를 건넸다. “그으러니까……” 나보고 지금 이걸 하라는 거지? 능란의 시선에 나나는 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볼 때는 가장, 가장해도 솔직히 귀엽기만 했는데─실질적 가장은 당연히 밥주는 사람인 이몸 아냐?─진화하고 나더니 어딘지 모르게 아빠 같아졌다고 해야 하나. 지금만 해도 봐라. 포켓몬이 건넨 것은 웬 전단지였다. 『급구! 피규어 구매대리』라면서 알아보기 힘든 무지개빛 폰트를 사용한 내용은 구구절절한 나머지 읽기 어려웠지만 어렵게 한 자, 한 자 해석해보니 이어..

020) 10.11. 일하는 가장

ㅡ나나 진화 더보기 꽃가람숲 깊은 곳, 그 중에서도 물레방아 움직이는 호숫가는 작고 약한 포켓몬들의 소중한 보금자리이자 쉼터였다. 물을 얻는 것이 용이하니 다양한 풀타입 포켓몬들이 머물렀고 부드러운 흙과 풀 덕분에 벌레타입과 땅타입도 다양하게 모였다. 더 크고 힘 센 녀석들은 굳이 태양 아래 고스란히 노출되는 호숫가를 쉼터 삼지 않았다. 빽빽한 나무들 사이에서 머무르다가 사냥을 할 때만 어슬렁거리며 나왔다. 힘센 포켓몬의 등장을 제일 먼저 알아차리는 건 나몰빼미였다. 물레방아 꼭대기에 앉아 있던 새는 날카로운 눈으로 천적의 등장을 확인하고 뺌, 뺌, 휘파람을 불며 울었다. 그러면 옹기종기 모여 있던 포켓몬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사냥에 실패한 포켓몬이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돌아가는 것이 이 땅의 맏이..

019) 가을바람의 꿈 飋夢 5

ㅡ부화로그 5 더보기 트레이너와 함께하는 포켓몬은 성장이 빠르다고 한다. 야생에서는 진화하지 못하는 개체가 더 많지만 트레이너가 있으면 간단히 진화해버리는 것만 봐도 그렇다. 포켓몬의 성장촉진제, 이렇게 말해도 될까? 이제는 통론이 되어버린 이야기처럼 트레이너 캠프의 포켓몬들은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 이는 물론 알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였다. 지난밤, 알들이 일제히 부화하고 탄생하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지. 능란의 알도 부화시기가 머지않았다. 처음 알을 받았을 때와 비슷하게 표면이 아주 얇으면서도 물주머니 대신 살얼음처럼 섬세한 구체를 능란은 조심스럽게 품었다. 온전히 알 스스로 깨고 나올 수 있도록 약간의 충격조차 조심스럽다. 표면에 손가락을 얹으면 박동이 선명했다. 꼼실거리는 움직임, 미약한 웃음소리..

018) 가을바람의 꿈 飋夢 4

ㅡ부화로그 4 더보기 어느새 껍데기가 딱딱해졌다. 이 딱딱한 표면이 살얼음처럼 깨지기 쉬워질 때까지가 가장 중요한 시기다. 곧 있으면 안에서 발차기도 해버릴 수 있다는 거다. 능란은 포대기처럼 만든 알주머니에 우르의 솜을 더 깔고 혹시라도 알이 떨어지거나 충격을 받지 않도록 두 겹, 세 겹 줄을 둘렀다. 애지중지하는 트레이너를 관찰하던 빠모가 어깨 위로 올라와 알을 톡 건드렸다. 그러자 에코처럼 알 안쪽에서도 톡, 반응이 돌아왔다. 벌써 이만큼 컸나, 놀라는 건 트레이너뿐. 겁 많은 포켓몬은 후다닥 도망가버리고 만다. 그래도 얼마 안 가 빼꼼 머리를 빼내고 다시 알을 보러 오는 걸 보면 많이 익숙해진 듯 싶었다. “요오, 그렇지. 역시 후속편이 궁금한 거지. 어서 오라구.” 천생 수다쟁이에 이야기꾼인 여..

017) 10.09. 반추反芻

ㅡ피엠 귀하 더보기 큰 괭이 하나, 작은 괭이 하나, 난데없이 이런 농기구 같은 게 어디서 난 거냔 물음은 하지 않는다. 여자에게는 늘 어딘가 비밀주머니가 있기 마련 아니겠는가. 긴 나무 봉을 만지는 순간 반사적으로 봉술 자세를 취하려던 능란은 앗, 이게 아니지. 제 머리를 콩, 때리며 피엠의 자세를 관찰했다. 그러니까 손잡이는 이쯤에서 붙잡아서……. “서향 씨의 오두막 앞에 공터가 있었잖아. 거길 써도 된다더라고.” “오오. 그럼 당장 가자~”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씩씩하게 찾아간 것은 좋았으나 펼쳐진 땅은 만파식적의 뒤쪽 밭보다도 크기가 커보였다. 어라, 이거 괜찮은가? 허리가 쭈뼛 서는 걸로 보아 보통 노동이 아닐 거란 예감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하나. 옆 사람이 이미 밭 갈 준비를 하고 있는..

016) 가을바람의 꿈 飋夢 3

ㅡ부화로그 3 더보기 ──어라, 이야기 들으러 또 온 거야? 그럼 마저 이야기해볼까. 오늘의 산책은 는개의 밤바다다. 한 번 바람이 불 때마다 비리고 짠 내음이 훅 풍겼고 뒤이어 파도 소리가 철벅, 철벅 들려와 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무드가 형성되는 곳이었다. 막 씻고 나와 뽀송뽀송한 머리카락으로 소금 알갱이가 묻어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여자는 모래사장을 폴짝폴짝 걸었다. 그 사이 알은 제법 묵직해져 있었다. 이제 표면을 건드려봐도 말랑말랑하지 않았다. 간신히 말랑말랑 물주머니 같은 알에 익숙해지던 참인데! 빠모가 배신감 어린 표정으로 알을 경계한다. 이쯤부터는 능란도 포켓몬을 타일렀다. 이제 조심해야 해. 알이 직접 깨고 나오기 전까지 우리가 먼저 깨버리면 안 된다는 거야. 알아들은 빠모가 능란의 ..

015) 10.07. 가을바람의 꿈 飋夢 2

ㅡ부화로그 2 더보기 숲의 밤은 마을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해가 짧아지는 계절이니 더욱 그럴 만도 했다. 몸이 더 식기 전에 야영지의 모닥불 앞에 가 포켓몬들과 알과 불을 쬐었다. 이럴 땐 역시 불 포켓몬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 불같은 건 능란 스스로도 3초만에 피울 수 있다.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물어와 줄 친구들까지 생겼으니 더욱이 편하겠지. 그런 이유로 포켓몬을 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네가 누구든 사랑해주고 말 것인걸. 이유 있는 맹목盲目이다. “여기선 어떤 아이가 태어나려나.” 누구는 힌트라도 받은 것 같은데 당당하게 전부 좋다고 해버렸으니 정말 짐작도 가지 않는 것이다. 서프라이즈일수록 궁금증은 부풀어만 간다. 불길이 일렁일 때마다 우르의 털색이 오렌지빛으로 물들다 돌아오길 반복..

14) 10.06. 가을바람의 꿈 飋夢 1

ㅡ부화로그 더보기 바람 한 번 불 때마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계절, 쌓인 낙엽 더미 아래로 새 생명이 움트기 위해 땅도 쉬어가는 이 시기를 능란은 제법 좋아했다. 뭐니 뭐니 해도 버섯이 맛있기도 하고, 이 뒤에 찾아올 침묵하는 겨울까지 식량을 잔뜩 비축해두는 일이 즐거웠다. 이런 시기에 맡게 되는 알이라니, 능란 자신이 생명을 덮는 낙엽 더미처럼 따뜻하게 품어줘야 하겠다는 책임감이 더 들 법도 하다. “충분히 고민하고 결정한 것 같으니까 믿고 맡겨보도록 할게. 어떤 아이가 태어나더라도 예뻐해 줄 수 있다고 했지?” “어떤 아이든 듬뿍 사랑해주도록 할게.” 부화기에 소중히 넣어진 알을 품에 받아 들고 능란은 힐쭉 웃었다. 알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텐트로 돌아오자 어느새 셋으로 늘어버린 포켓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