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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논픽션 로맨스

For.올리버 더보기 #.0 불쑥 나타난 팔이 여자의 어깨를 돌리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새벽 공기의 쌀쌀함을 가르고 먼저 다정한 열기가 스며든 덕이었다. 익숙한 스킨, 희미한 이불 냄새와 열을 머금은 체취……, 향기가 형태를 그린다. 그가 그려졌다. 아니, 정말로 눈앞에 그가 있었다. 몰래 그를 생각하고 있던 것을 들켜버린 줄 알았다. 정작 달려온 남자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활짝 웃으며─, “당신이 보고 싶어졌어요.” 고작 그런 충동 하나로 이 새벽 길을 달려왔노라고 말도 안 되는 고백을 해오는데 말이다. 여자가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어떻게 만날 줄 알고 이 드넓은 런던 거리 한복판을 달려온 걸까. 만약 만나지 못했으면 어쩌려고ㅡ. 물어보면 또 한없이 낙천적인 얼굴로 답했을까. [하지만..

with.주노 2023.09.02

34) 고작 그런 것

For. 올리버 더보기 잡지 인터뷰, 때때로 출연하는 라디오 게스트, 어쩌다 불려 나가는 브라운관 토크쇼, 사람들은 그때마다 여자에게 식상한 질문을 해왔다. “신디 씨는 꿈이 뭐예요?” 그야 이제와서 장래 희망 같은 것을 말하라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앞으로의 비전? 거창하기도 하다. 어른스럽게 말해 향후 계획,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이후의 방향성 같은 것도 되겠다. 이런 걸 물어봐서 어쩔 건데. 그때마다 신디는 아이스크림 트럭을 운영한다는 저 바다 건너의 누군가를 떠올리며 대답하곤 했다. 옷가게요. 그러면 사람들은 일제히 야유를 던졌다. 에~이, 그 ‘신디’가 운영하는 게 평범한 옷가게일 리가 없잖아요. 신디만의 명품 브랜드 창설? 앞으로 C는 샤*이 아니라 신디가 되나요? 하나같이 남에게 관심 많고..

with.주노 2023.09.02

33) 500 챌린지

For.주노 어제가 무려 주셸 500일!!! 더보기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요?] 아침부터 도착한 연인의 메시지에 주노는 잠깐 심호흡을 했다. 듣자하니 여기에 답하지 못해서 싸우는 커플의 수가 저 살비 앞바다의 모래알만큼 많다던가. 물론 그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었다. 22일, 100일, 200일, 300일, 1주년을 거쳐…… 벌써 오늘로 500일. 그러니까 즉 사귄 지 500일 되는 기념이라는 특별한 날인 것이다. 지금도 기록을 할 때 스마트 로토무보다 노트와 펜을 선호하는 주노는 일정 같은 것도 스케줄러에 수기로 작성하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디데이 어플 같은 것도 써본 적이 없고 오늘이 사귄 지 며칠째 되는 날인지도 생각나서 확인해볼 때가 아니면 기민하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반면 스마트 로..

with.주노 2023.08.10

32) 언해피데이

for. 올리버 더보기 언해피데이 숨이 막힐 정도의 갑갑함, 코를 찌르는 시원한 스킨 냄새, 품을 감싼 체온은 에어컨 바람을 가로막으며 온기를 안겨준다. 글쎄,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비몽사몽인 채로도 비현실적임을 감지해낼 만한 비상사태였다. 에스프레소를 원샷한 기분으로 정신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온몸의 핏기가 사악 빠졌다. 매니저가 보았다면 감동의 눈물을 흘릴만한 기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그녀가 눈을 뜬 자리는 무려 (어쨌든) 남자친구의 품 안인 것이다. (일단은) 남자친구 품에서 눈을 뜨는 게 뭐 어때서? 그야 뭐가 어떻다. 태어난지 40개월을 지난 이래로 단 한 번도 남들 다하는 ‘평범함’을 보내본 적 없던 여자는 이게 차라리 버라이어티 촬영 중이길 바랐다. 어떻게 이럴 수 있..

with.주노 2023.08.03

31) 밀밭에 부는 바람

for. 주노 더보기 [1] 낯선 곳에 떨어진 아가씨가 제일 먼저 알아차린 건 젖은 흙냄새였다. 정원의, 바짝 마른 토양 위로 정원사가 표면을 적실 만큼 끼얹은 물이 증발하는 냄새가 아니라 긴 시간 꽁꽁 얼었던 겨우내 흙을 괭이로 전부 갈아엎어 저 깊은 바닥에서부터 뒤집혀 섞인 오래되고 눅눅한 젖은 흙냄새. 땅속에 잠들어 있던 수많은 작은 생명체들과 양분들이 봄 밤, 달빛 아래서 몸을 말리며 나는 낯선 냄새다. 당장에 의존할 게 오감 중 후각이었다. 주변은 흐리멍덩하게 실루엣만 알아볼 정도로 캄캄했고 귀를 기울여봤자 바람에 숲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나 짐승 울음소리나 들려 공포를 부추기기만 할 뿐이었으니. 이렇게 캄캄한 밤은 아가씨에겐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도 그랬다. 토마스 에디슨이 백열전등을 개발하고 전..

with.주노 2023.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