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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과학자와 악마와 동화책

: 루 모겐스 고요한 밤이었다. 짙게 깔린 먹구름이 달마저 가려 그림자가 생길 여지도 보이지 않는 칠흑의 밤이었다. 장대비가 쏟아지려는 걸까. 아직은 마른하늘에서 천둥소리부터 우렁차게 들려올 즈음 번개보다 먼저 번쩍, 하고 바닥의 마법진이 빛났다.창밖으로도 번쩍하고 보일 만큼 환한 빛이었다. 수많은 책과 플라스크와 양피지와 잉크 냄새로 가득한 연구실에서 유일, 깨끗한 바닥에 그려진 그것은 정확히 표현하자면 마법진보다 어떤 복잡한 계산식에 가까웠다. 빼곡히 적힌 계산식은 어쭙잖은 지식으로는 읽어내는 것보다 무리였지만 만약 이해할 수 있는 이가 본다면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눈물 흘리며 존경과 감탄, 찬사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그거 꼭 읽어야 해? 조금 부끄러운걸.)(쉿!)정녕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영역..

with.루 2019.10.31

46. 아름다운 것, 손에 닿는 것

: 르윈 알렉시아 우주에서 가장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 있다면 혜성이라 답할 것이다─, 라고 누군가 말했었지. 천문학자였나. 스스로를 불태우며 깎아나가면서도 멈추지 않는 빛무리. 꼬리를 길게 빼고 태어나 죽을 때까지 그저 우주를 가로질러 제 궤적을 남기는 아름다운 혜성.아인델은 우주의 이치에 밝지도 않았고 혜성을 보며 뽐낼 대단한 지식이 있지도 않았다. 혜성이 우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말에도 글쎄, 간단히 동의하지 못했다.그녀에겐 더 아름다운 것이 있었다. 손닿지 않는 광활한 우주의 빛이 아니다. 뻗으면 닿을 가까이에 있는 반짝임이다. ──빛나는 것은 아름답지. 그 빛이 손에 잡힌다면 더욱 아름다울 거야. 아인델 아라크네 아스테반은, 트리플에이의 삶은 그러하였다. 아름다운 것이 있으면 손을 뻗었고 그 욕..

소멸, 탄생 2019.10.27

45. 나는 아직 전부의 너를 모르지.

: 후이 이샤오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오른다. 물음표를 따라 섬세한 턱 끝이 기우뚱 기울었다. 어째서 제 옆의 아이가 돌연 이렇게 뻣뻣해져버리고 만 것인지 여기 오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어 봐도 아인델로서는 짐작 가는 일이 없었다.“왜 그러니, 후이?”“아뇨아무것도요영화엄청기대되네요그죠?”그러나 아무리 봐도 기대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기이하다는 그녀의 시선에 후이는 도통 여길 보지 않는 먼 시선으로 어서 자리에 앉자고 재촉만 할 뿐이었다.입구를 나란히 걸었다. 걷는 사이 다시 한 번 추측해보았다. 돌이켜보면 아주 평범한 일과였다. 얼마 전 개봉한 액션 영화의 시사회 초대권이 손에 들어왔고 이 영화를 좋아할 것 같은 인물에게 보러 가겠느냐 연락을 했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종종..

소멸, 탄생 2019.10.08

44. C+

: 장 디뉴엘 “지저분한 얼굴이구나.”꼭두새벽부터 이루어진 회의에서 돌아오자마자 장이 제 파트너에게 들은 첫 마디였다. 장의 얼굴이 단숨에 팍 찌푸려졌다.새벽 순찰조로부터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다는 급작스럽게 호출이 있었다. 덕분에 눈 뜨자마자 면도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아직 꿈나라인 파트너를 내버려 둔 채 가이드 회의를 치르고 돌아온 참이었다. 회의 자체는 순조로웠지만 어떤 변수가 될지 모르는 정보가 또 하나 늘어나는 건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그런데 돌아오자마자 듣는 말이라곤, 겨우 잠을 깨운 듯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던 아인델의 고개가 느긋하게 기울었다. 빈 손이 뻗어와 수염으로 까끌거리는 턱을 더듬었다.“네가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건 드물지 않니.”그야 시국이 어느 때인데, 대외적 이미지..

소멸, 탄생 2019.10.08

더없이 많은 사랑을 내게

: 루 모겐스 *기억해, 루? 그 밤을.나는 아직도 선명히 기억해.그 날이 있고부터 여전히 꿈속에 사는 것처럼.* 그 날은 말이지.하루 종일 엄청 긴장해서, 좀처럼 진정하지 못해서어쩌면 루가 보기에도 이상했을지도 몰라.한편으로는 이상할 만큼 차분하고 덤덤해서,꼭 이미 전부 끝난 것처럼 말야.그래서 오히려 아무렇지 않기도 했던 것 같아.그 날의 내가 루의 눈엔 어떻게 보였을까.평소랑 같았을까? 조금 옛날이야기부터 해보자.좋아한다는 말은 하나도 새삼스러운 게 아니었어. 그야 언제나 루를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동시에 엄청나게 엄청 새삼스러운 말이기도 했어.아무렇지 않게 “나도 좋아해.” 하고 말했지만 내 좋아해는 루의 좋아해와 달랐으니까,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어.루에게 친구로 있겠다고 해놓고 한 순간도 루의 ..

with.루 2019.10.07

살아줘

: 루 모겐스 *주 의* 이어지는 로그는 백결 님의 coc 시나리오 '단 한번의 믿음'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열람에 주의해주세요. * * 이번엔 바라는 대로 되었어?바라던 대로 당신을 봐주었을까?틀리지 않고 나를 위하고 당신을 위하는 선택을. * *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눈발이 날려들었다.“지금부터 루 모겐스를 참수형에 처한다.”피의 향기, 사람들의 절규, 아비규환인 그 사이를 유유히 흩날리는 송이송이 눈발이 펼쳐지는 광경을 꿈결처럼 만든다.「나를 믿어줘서 고마워.」우뚝 선 두 귀의 왼쪽에서는 사명감과 충성으로 뜨거운 목소리가, 다시 오른쪽에서는 마치 영원의 서약이라도 하듯 열없이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디에도 그녀의 의사는 없었다. 재판장에 오른 순간부터 그랬지만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with.루 2019.09.05

목욕 후의 풍경

: 루 모겐스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안쪽을 가득 채웠던 수증기가 넘실넘실 거실로 퍼졌다. 촉촉하고 따뜻한 공기는 소파에 앉아 뒹굴거리던 에슬리에게까지 닿아 자연스럽게 재채기가 나올 듯 코끝을 간질였다.나도 씻어야 하는데……, 생각만 하면서도 소파에 파묻히듯 기댄 자세가 편해 쉽사리 몸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그런 그녀의 눈앞으로 젖은 멍멍이가 지나갔다.정확히는 구부정한 자세로 덥수룩한 머리카락까지 푹 젖어 물기를 뚝뚝 흘리는 거대한 멍멍이, 를 닮은 애인.허리의 끈도 제대로 묶지 않아 아슬아슬한 목욕 가운 한 장만 느슨히 걸치고 카펫 위로 뚝뚝, 제가 어딜 돌아다니는지 발자취를 알리듯 물방울을 떨어트리며 어슬렁어슬렁 걷는 저 사람. 어디로 보나 고의성이 다분했다.그도 그럴 게 어슬렁어슬렁 부엌으로..

with.루 2019.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