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스터 : 디 이노센트 제로 98

77) 03. 10. 사랑스런 대들보

더보기 저글링 친밀도 로그 샛별 체육관의 도전을 마치고 다음날의 한낮. 에셸은 우유푸딩을 만들고 있었다. 신선한 우유에 젤라틴을 녹이고 단맛을 조절하여 굳힌다. 어려울 것 없이 유리병에 몇 개나 되는 하얀 푸딩이 속속들이 채워졌다. 다 굳으면 캠프원들과 나눠 먹어야지. 만들다 남은 우유에는 과감하고 사치스럽게 홍차 잎을 듬뿍 넣고 끓여서 밀크티를 만들었다. 앵무새 설탕을 퐁당퐁당 넣어 홍차 향이 깊이 풍겨 나오는 그것을 후, 불어 마신다. 따뜻하고 달콤하고 노곤한 게 따로 천국이 없었다. 곁에서 밀탱크도 신선한 우유를 하나 퐁, 따서 꿀꺽꿀꺽 마신다. 에셸은 저글링 몫으로 피로슈키를 건네주었다. 그의 엔트리 중 인간과 비슷하게 식사를 하는 건 저글링과 서머링 뿐으로, 그마저도 서머링은 겉보기만큼 들어가는..

76) 03.09. 태엽이 감기는 소리

For.주노 더보기 「앞으로도 함께 이 떨림을 나눠주세요.」 계절이 하나쯤 앞서던 때의 어느 날이다. 실로 가볍게 내뱉었던 말이 세 달간의 여정을 관통할 줄은 그 때는 한 치도 몰랐다. 혹시 너의 캐이시는 그 때부터 이 미래를 보았을까? 기억의 태엽이 감기는 소리와 함께 실없는 의문이 느긋하게 흘렀다. 그 사이 보폭을 맞춘 걸음이 손과 나란히 이어졌다. 여전히 쉽지 않았다. 장갑 벗은 손을 보이는 게. 얼핏 스치면 티 나지 않을, 그럼에도 알아보고자 한다면 알아볼 수 있는 그 흉은 ‘무슨 일이 있었다’를 숨기지 못하게 했다. 그저 시선만 닿아도 어깨를 움츠렸다. 흉이면서 흠이었지. 그래도 너와 있을 때면 곧잘 벗었다. 손을 잡을 때, 머리를 만지거나 귓가에 닿을 때, 그러다 살짝 눈썹이라도 건드려볼 적에..

75) 03.09. 거리조절의 시간

For. 말라카이 더보기 싫어한다는 건 반대로 말해 그것이 제 약점임을 시인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언짢음이나 분노로 표현하지 않아도 제 의사와 상관없이 주어진 결핍이 그에게 상처를 만들었으리라는 건 눈에 선히 보였다. 열다섯의 말라카이는 더는 엄마 없는 집이 아니었음에도 여전히 그와 관련해 날선 반응을 숨기지 못하는 것처럼. 어머니가 있고 없고가 중요한 문제가 아닌 걸 테지. 이미 한 번 그의 마음에 깊이 흉을 남기고 만 그것은, 시시때때로 전혀 다른 자극에도 불구하고 부싯돌이 튀기듯 뜨겁고 붉게 소년을 태웠다. 진화鎭火가 필요했다. 너를 상처 입히려 하는 말에 넘어가 스스로를 상처주지 말라고 누군가는 알려주어야 했다. 하늘을 찌를 듯 마구잡이로 쌓인 젠가를 시간을 들여 하나하나 천천히 뽑아줄 손이 ..

74) 03.03. 샛별 체육관 On Air

더보기 샛별마을의 라이브 하우스에 당도하였을 때 에셸이 제일 먼저 느꼈던 건 귀가 먹먹할 정도의 소음이었다. 옆에서는 환호성을 지르고 머리를 흔들고 두 팔을 높이 뻗은 채 땀과 에너지를 쏟아내는 이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환호와 즐거움, 그들이 느끼는 짜릿함을 공유하기에는 두통이 앞섰다. 전자음이 지잉- 울리는 멜로디를 감상할 여유도 없었다. 다음에는 이곳에서 체육관 도전을 해야 하는 건가. 체육관 관장 데코가 다루는 전기타입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선글라스부터 필수인데 대하기가 참 난처할 것 같다. 그런 생각부터 가졌다. 그러다 폐전력발전소에서 헬릭스단과 조우하고 여러 일들을 거치며 체육관 도전 이전에 제 발로 먼저 라이브 하우스를 방문할 일이 있었다. 데코의 초대가 있던 덕이지만 제안처럼 스트레스가..

73) 03.03. 산책

더보기 ──이것은 체육관에 도전하기 전날의 이야기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에셸은 포켓몬들을 데리고 샛별에서 둔치로 넘어가는 근방을 걸었다. 저기로 가면 저희 집이 있답니다. 유일하게 에셸의 집을 아는 위키링은 조금 더 으스대며 언덕을 넘어 어렴풋이 보이는 등대를 가리켰다. 저 등대 다음으로 높은 곳에 에셸의 집이 있어~ 위키링의 설명에 포켓몬들은 우와아, 귀를 기울였다. 가보면 안 돼? 지금, 지금. 에셸의 팔에 흔들흔들 매달린 바나링에게 지금은 좀 힘들어요. 우리 단체 활동 중이기도 하고, ……집에 갔다가 잡히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어머니는 열심히 참고 있었지만 언제라도 에셸을 잡아올 생각이 만만했다. 곧 둔치라는 걸 어머니도 아실 텐데 이를 어쩐담. 생각하며 그만 돌아가려던 에셸의 눈에 ..

72) 03.01. 사랑동이와 데인차

With. 심랑 더보기 핑복을 만나고 싶어서 배틀카페를 다니던 에셸의 눈에 때마침 운명의 엇갈림처럼 들어온 건 심랑 앞에 나타난 데인차였다. 가라르 지방으로 홍차 유통지를 얻기 위해 갔을 때 무수히 자주 마주쳤던 고스트 타입의 포켓몬이었다. 툭하면 에셸 주변으로 나타나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일으키는 덕에 위키링이 성가셔하곤 했었지. 하지만 홍차를 유통하는 사람으로서 꿈이 아닌가요? 포트데스의 마음을 얻으면 꿈에서나 마실법한 굉장한 홍차를 마실 수 있다고 하잖아요. 만약 조금 더 신중하게 고민했더라면 역시 참았을지도 모르지만─물론 운명은 참아지는 게 아니더라고요─에셸은 정말 이것이 어떤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심랑에게 만남을 주선해주길 부탁했다. 그리고 현재, 심랑에게 부탁받은 사랑동이를 무사히 품에 안을 수 ..

71) 03.01. 고스트 웨딩

With.말라카이 더보기 혜성시티 의뢰, 남는 건 사진 뿐! 코스프레 사진관 「마임포토」의 전단지는 첫날 메이든에게 받았을 때부터 파일철에 담겨 에셸의 가방에 고이 담겨 있었다. 이런 건 놓칠 수 없죠~ 사진은 찍는 것도 찍히는 것도 좋아한다. 무엇보다 사진으로 남기는 것을 좋아한다. 이왕이면 혼자 가긴 쓸쓸하고 누구와 함께 갈까. 기회를 벼르던 중 에셸의 레이더에 걸린 건 말라카이였다. 이런 걸 왜 찍는 거야. 그보다 내가 찍어서 누가 좋아한다는 거야. 말라카이 소년과 함께 여행을 한지 어언 2달. 에셸은 그가 스스로에게는 대단히 무관심하다는 걸 이제 알았다. 분명 찍으면 다들 좋아할 거라니까요. 적어도 제가요! 결국 설득에 성공해 말라카이를 옆에 데리고 메이든에게 사진관까지 가는 법을 상세히 들었다...

70) 02.28. 파도 소리와 흰 밤

For.주노 더보기 때로는 사진으로 남기지 않아도 망막에 새겨지는 풍경이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 위로가 된다. 누림마을에서 시작해 혜성을 지나고 다라를 거쳐 살비에 이를 때까지 얼마나 많은 풍경을 눈에 담고 기억했을까. 그때마다 두 사람분의 발자국이 이어졌다. 꼭 지금처럼. 그래서일까. 없으면 서운할 것만 같아 약속을 한 것도 아니면서 그를 찾아갔다. 나름의 어리광이라는 걸까. 「에스코트는, 항상…… 해드릴 테니까.」 저한테 연습하라던 말이 파도를 따라 밀려들었다. 차박차박 물길을 밟으며 그 때 하지 못한 답을 고민했다. 그러나 생각나는 거라곤── 집사복 잘 어울렸지. 예쁘게 넘긴 머리에 모노클까지. 제법 태가 났었는데. 홍차도 허브티만큼 맛있었어. 마담들에게 인기가 많아 보이던데. 결국..

69) 02.28. 어둠이 걷힐 때까지

더보기 냐미링 친밀도 로그 사건이 끝난 뒤 모두들 그저 제 한 몸 간수하기 벅차 복잡한 감정과 피로가 뒤섞여 숙소로 들어왔다. 이런 날까지 누군가와 부대껴 공간을 나눌 여유도 없었기 때문일까. 다들 긴 말 하지 않고 각자의 방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해변가에서 바비큐를 구워 먹고 불꽃놀이를 즐기며 떠들썩했더라는 게 신기루만 같을 정도다. 숙소 로비는 적막이 짙었다. 가끔 나지막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도 있었지만 모두 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타인의 안에 잠든 감정도, 제 안에 들끓는 감정도 섣불리 건드릴 수가 없어서. 그런 점이 캠프 사람들의 상냥함을 증명하는 것도 같았지만. 느슨한 미소가 그려졌다. 로비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냐미링. 오늘은 당신에..

68) 02.28. 용서

더보기 9주차 리포트::용서 너무 많은 일이 지나갔다. 피곤함에 눈을 꾹꾹 누르면서도 하루 동안 벌어진 일을 정리하기 위해 에셸은 늦은 밤, 태블릿PC를 열었다. 서두는 부모님에게 보내는 안부였다. 「우선, 저는 무사하니까 모쪼록 걱정하지 마시라는 말씀부터 전할게요. 둔치시티까지 가깝기도 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드릴 테니까요. 이쪽은 상황이 어수선해서 찾아오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쪽에선 경찰청의 움직임은 없던가요?」 문장을 가다듬어 둔치시티의 상황을 살피는 연락을 마치고 겨우 한숨을 돌린다. 그동안 포켓몬들도 깨어서 그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붕대가 감긴 손을 뻗자 바나링이 제일 먼저 매달려 왔다. 볼에 가만히 있던 시간이 어지간히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다행이었다. 여정이 힘들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