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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 터진 과일과 어떤 비극의 이야기

: 루 모겐스 모든 사람은 비극을 좋아한다. 에슬리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예술가들은 언제나 비극에 관한 시와 노래를 적었고 지식인들은 인간에게 들이닥치는 비극에 관한 고찰로 몇 백 페이지짜리 두꺼운 책을 쓰길 즐겼다. 가장 비극에 휘말리기 좋은 아무 능력 없이 평범한 인간들은 어떤가. 불행에 심취해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애를 채우거나 그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영웅을 기대하거나 가끔은 자기들 손으로 희생양을 골라내 그를 추대하는 척 은근슬쩍 제물로 바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비극 뒤엔 무엇이 남느냐고? 아무것도 남지 않거나, 그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의 재를 밟고 일상으로 돌아가겠지.사람이라면 누구나 비극을 좋아한다. 그들이 비극을 좋아하는 건 그것이 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여기엔 비극에 무릎 꿇은 이..

with.루 2020.09.20

단델리온과 아스트레아

: 루 모겐스 “나는 아리아 할머니를 닮았대.”새가 지저귀듯 시종일관 들뜬 투를 하며 소녀가 돌담 위를 걸었다. 할머니는 아주 똑똑하고 멋진 분이셨대.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가벼운 걸음이 이대로 지면을 딛고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실제로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아스트레아 C 모겐스에게 있어서 그 일은 종아리를 팽팽히 당겨 뛰어오르든 마법을 쓰든 아주 쉬웠다.“엄마도 아빠도 그리운 표정이었어.”얼굴도 모르는 할머니가 덩달아 그리워지기라도 한 걸까. 청은의 눈동자가 풍성한 속눈썹 아래 끔뻑였다. 고개가 기울어짐에 따라 조막만한 얼굴이 은발에 감춰지면 그 모습은 또 얼마나 가련하고 사랑스러운지. 어디로 보나 사랑받고 자란 티가 듬뿍 묻어나는 소녀였다. 실은 얼마나 영악하고 건조한 속내를 감추고 있는지는 ..

with.루 2020.07.07

Beyond the 999 Days

: 루 모겐스 #.993“기대되지 않아?”맑은 날이었다. 새벽이슬이 덜 말라 촉촉한 아침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에슬리는 그보다 두 계단 앞섰다.낮이 되면 또 무더워지겠지. 그렇지만 지금은 아직 손을 맞잡기에 딱 좋았다. 높이도 아주 딱.“계단 위에 뭐가 있을지 난 벌써부터 설레.”그러니까, 얼마나 더 남았는지 세지 말고. 연인의 눈이 어디로 향하고 무얼 헤아리는지 순식간에 알아차리고 핀잔을 놓으면, 그런 거 아니라고 그는 시치미를 뚝.그러면 사알짝 흘겨보다가 특별히 넘어가준다고 손만 고쳐 잡았다.마디가 단단한 손가락 사이로 그보다 작은 손가락이 촘촘히. 온도는 변함없이 따스했다. 당신이, 내가 여기 있다는 증거다. ――단숨에 마음이 들떴다.“오늘도 분명 즐거운 날이 될 거야.”우리가 함께하는 것만으로.두..

with.루 2020.07.07

AF::016. 오늘의 일기 6월 19일

: 니켈 “도시로 돌아가지 못해도 괜찮아요.”“저도 이제 디모처럼 새로운 자리가 생긴 거니까.”그렇게 말하는 니켈은 무척 어른 같으면서 동시에 천진하게도 보였습니다.현실을 받아들일 줄 아는 어른의 얼굴과 그 속에서 꿈을 찾은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 동시에 있었습니다.그런 니켈의 얼굴을 보고 저는 안심하였습니다.・・・폴과 닉이 함께 있는 풍경은 재미나다. 겉보기부터 다른 두 사람은 함께 있을 때 서로 지닌 온도도 참 달라서 사랑이라는 건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끌려간다고 하는 설명을 두 사람을 보며 알 것 같았다.딤이 이런 말을 하면 닉은 “그렇지 않아요, 디모. 우리 이래 봬도 공통점이 얼마나 많은데요.” 하고 어떻게든 공통점을 찾고 싶어 할 것이고 폴은 “그야 다르지. 살아온 환경부터, 또 성격도…….” ..

여름 낮, 정원 돌봄 계획

: 루 모겐스 베일의 여름은 걱정했던 것만큼 덥지 않았다. 도시 안까지 물길이 나 있는 아름다운 수상도시가 여름에는 물지옥으로 변하는 게 아닐까─실은 이트바테르의 여름이 지독하기로 유명하다─지레 겁을 먹었던 것에 비해 놀랍도록 산뜻한 공기였다.그래봤자 아직 6월, 갓 여름에 접어들었을 뿐으로 벌써부터 베일의 여름을 다 본 것처럼 굴기엔 섣부른 감이 있었지만 흐드러지도록 색색의 봄꽃으로 물들었던 언덕이 파릇파릇한 잎사귀로 옷을 갈아입는 계절의 변화 가운데서 시작이 나쁘지 않았다.“여기는 우기가 9월에서 11월쯤이래.”“헤에. 꽤 늦는구나.”“응. 그러다가 가을겨울에 홍수가 날 만큼 물이 불기도 한다나 봐. 눈은 거의 안 내리고. 눈이 보고 싶으면 위로 올라가래.”“그럼 겨울이 되면 엘버에 다녀와도 좋겠어...

with.루 2020.06.16

AF::015. 오늘의 일기 6월 13일

: 디모넵의 요리에 휘말린 사람들 오늘은 요리에 도전하는 n번째 날이에요! 저 미지수는 뭐냐고요? 저도 몇 번째인지 안 세고 있거든요. 언제까지 도전이란 타이틀을 붙일지 모르겠어요. 제게 요리가 도전이 아니게 되는 날까지 계속 이럴지도 몰라요.왜 요리에 도전이란 이름을 붙이게 되었냐고 하면은 제 요리가 아무래도 맛이 없다는 깨달음과 이대로 있을 순 없다는 자기반성 및 성찰을 거치고 각성하였기 때문이에요.솔직히 말해서 제 입에는 아무래도 괜찮은데 말이죠.‘맛이 없어.’‘맛이 안 나는데.’‘맛 없잖아.’같은 얼굴로 먹는 상대를 보고 있으면 아무래도 자극을 안 받을 수 없잖아요. 에, 리브 욕이냐고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이게 다아 제가 맛없는 요리를 만든 탓이죠.(쑻)……이번 일기는 리브에게 들키면 안 될..

48. 날실과 씨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 #어린_자캐와_지금의_자캐가_만난다면 날실과 씨실이 교차되어 섬세하게 짜인 그물 끝자락에 방울져 고이던 물방울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추락한다. 제 몸을 희생해 퐁, 터지고 만 그것은 이윽고 하나 대신 전체가 되어 울림을 널리 퍼트렸다. 오케스트라의 첫음과 같았다.수면 아래로 잠겨 있던 의식이 첫음과 함께 떠오르면 그곳은 방이었다. 기억에 선명한 곳인 동시에 그리운, 제 유년기가 고스란히 담긴 아스테반 가의 방. 마지막으로 들른 기억이 언제였더라. 발홀에 입학한 뒤로는 들를 일이 없었고 아카데미를 졸업 후 에인헤리에 입대하면서는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방을 옮기자는 부모님의 의견을 따라 더는 쓰지 않게 된 곳이었다.그런데 왜 여기 서있는 걸까. 의문은 길지 않았다. 방안에는 아인델이 있었다. 그러니..

소멸, 탄생 2020.06.11

AF::014. 오늘의 폭주 5월 6일

: 올리브 이렇게 틈을 보이고 무게를 허락해주면 말이죠. 금세 어리광을 부려버리고 말아요.“그럼 한 번만, ──눈 감아줘.”이렇게요.쉽게 나온 말은 아니에요. 한 마디, 한 마디가 숨을 조이는 것만 같았어요. 심장이 쿵쾅거려서 그 소리로 머리가 꽉 차서 리브가 무슨 답을 주든 들을 자신이 없었어요.멋대로 상상하기로는 뭐? 여기서? 지금 당장? 꼭 그런 말이 들릴 것만 같았는데요. 정작 리브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대신에 한쪽만 드러난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바쁘게 굴러가며 하고 싶은 말이 전부 표정에 담겼죠. 평소 같으면 크게 터져 나왔을 목소리가 다 어디로 먹혀든 걸까요. 그만큼 제가 당신을 당황스럽게 했을까요?그야 그렇겠지만.리브가 자꾸만 저를 허락해주니까 어디까지 허락해줄 건지 그 선을 분명하게..

AF::013 오늘의 꿈 5월 1일

: 얀 바이올렛 스물한 살의 생일 전날 밤은 매해가 그러했듯 무척이나 설레었습니다. 하루 일찍 도착한 친구들의 생일 선물, 자정을 기다리는 축하메시지, 내일을 기대하라는 동거인의 자신만만한 표정. 하루하루가 꽃피는 봄날처럼 행복하고 평온하지만 1년에 한 번 오는 기념일이란 유독 각별해서 그 날 밤 침대에 누우면서도 괜한 설렘을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당신이 보내온 선물도 매해 그러했듯 잘 도착해 있었습니다, 얀.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지가 언제였지요. 누군가의 생일을 챙기는 당신의 모습이 한 때는 도통 상상이 가지 않았었는데, 받은 편지와 선물이 나날이 쌓여만 갑니다. 내일 케이크와 함께 개봉할 21번째 생일 선물도 기대하고 있습니다.문득 떠오른 감상은 이날을 기점으로 제가 첫 만남의 당신과 같은 나이가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