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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 일크누르 모겐스 “내게 먼저 다정했던 건 당신인걸.”나는 그저 받은 것을 되돌릴 뿐이야.발자국은 나란히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도 좋지만, 나는 당신의 바로 앞에 마주 서 새 발자국을 남겼다. 그리고는 당신의 머리색처럼 어딘지 뿌옇게 흐릿한 미소를 바라보며 먼저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와 닿는 것은 변함없는 온기. 지금은 내 쪽이 조금 더 체온 높을까? 바깥을 걸은 탓인지 살짝 뻣뻣해진 손가락을 꼭 감싸 쥐고는 까만 눈동자 안에 당신의 표정을 담는다.당신의 머릿속에 어떤 지독한 태풍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걸까.“내가 경멸하거나 두려워할까봐 무서워?”내가 당신의 말을 듣고 곁을 떠날까봐 두려워? 느릿하게 질문을 던진다. 표정을 읽어본다.그렇다면 루, 나는 곁을 떠나지 않아. 떠날 걸 걱정할..

심연의 서막 2017.07.21

에슬리 챠콜 씨의 일일

1803년공부를 방해한다고 언니가 못마땅하게 보면 어쩌지? 그치만 여기 디저트, 꼭 소개해주고 싶었어! 어때, 맛있어?또 이사? 당신 집으로? ……알았어.우리, 실베니아로 가던 길에 만났던 거 기억해? 그 때 말이지, 난 솔직히 아카데미 같은 곳 왜 가는 걸까 이유도 모르고 무작정 움직이고 있었어.다음에 또 초대해주면 좋겠다. 그 땐 어머니한테 줄 선물도 가져갈 거야. 어떤 걸 좋아할까? 으음~, 지금부터 고민할 것 같아. 1804년어째서 좀 더 일찍 말해주지 않은 거야? 갑자기 아, 이번에 국군의 정식기사가 되었습니다. 하고 말하면 놀라잖아.당신을 뒷배로 삼을 거니까, 그 때까지 기다려줘야 해.누군가 내 행복을 빌어준다는 게 든든하다는 것도. 그러니까 나도 이곳에서 여전히 당신의 행복을 바라고 있다는 ..

심연의 서막 2017.07.20

가속하는 봄과 정지된 겨울

: J. 디셈버 윈터가든 “──할 말 없나요?”두껍고 동그란 안경 너머로 본 적 없는 그의 눈동자가 샐쭉하게 접힌 듯한 기분이 든다. 이쪽에서 그를 보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는 이쪽을 보는 게 가능하다는 부조리함이 지극히 그다운 시선에 에슬리는 가볍게 목덜미를 쓸었다.“그럼 물어봐도 돼? 디셈버 몇 살이야?”이런, 내가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을 텐데요. 읊조리면서도 그는 여전히 노래라도 하듯 가벼운 어조로 답해주었다.“네가 보는 대로랍니다.”“아하, 그럼 할아버지?”“할아버지 같나요?”그럼 그렇게 보도록 하세요. 그보다 내가 묻고 있는 건 다른 얘긴데. 말과 함께 한 발짝 다가온 그가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평소처럼 이마를 두드리는 대신 한 줌 머리카락을 쥐어든다. 그의 손바닥 위에..

심연의 서막 2017.07.20

챠콜의 일기 : 모겐스 선배

: 루 모겐스 오늘의 날씨 : 거지같음 오늘도 ‘그 선배’가 시비를 털어 왔다. 빌어먹을. 대놓고 차별하지 않는다던 사람은 어디로 간 거야. 뒷배나 서줄 것이지. 차별이란 것은 언제고 기분 좋을 리 없는 것이었지만 대놓고 하지 않는 쪽이 더 기분 나쁘다. 열 내는 이쪽이 도리어 바보 같아져.언제나처럼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 운동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구간에 들어서자 막 자기 말을 돌보던 그 선배와 마주쳤다. 아침부터 재수가 없었지. 눈이 마주쳐 하는 수 없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그 선배는, 아니 그 놈은 픽 비웃음부터 내보였다.-이런, 너무 다가오지 말아주겠습니까? 당신이 오면 말이 흥분해버려서요. 겁을 먹지 않습니까.느글느글한 목소리에 위아래로 훑어보던 시선, 그 시선이 마지막에 어디로 꽂히는지 ..

심연의 서막 2017.07.20

챠콜의 일기 : 집사 졸업?

: 아바얀 루 「나 조만간 이트바테르에 다녀올 건데 가는 김에 얀네 집에 놀러가도 돼?」「그러든가요.」답신은 여전히 성의 없게 짧았다. 혹시 편지가 귀찮아? 하고 물어본 적도 있지만 돌아온 답은 그런 말 한 적 없는데요? 좀 더 길게 써달라고 투덜거리자 돌아온 건 세로쓰기와 입막음용으로 보이는 과자. 그것도 한두 번이지 이제는 그냥 내가 적응해버렸다. 그래도 조금씩 성의가 깃드는 것 같으니까.중요한 건 허락을 받았다는 거다. 몇 년 만에 만나는 거지. 3년 좀 넘었나? 오랜만에 보겠네. 여행 준비를 하면서 내가 품은 생각은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뭐라더라. 아들이 상단을 물려받고는 몇 년 만에 그 큰 걸 쫄딱 말아먹었다고? 새벽이면 짐마차가 줄을 이어 들어와 물건을 두고 가던 진풍경이 사라진지도 좀 ..

심연의 서막 2017.07.20

챠콜의 일기 : 집

: 에르덴 아다르크 오늘의 날씨 : 비가출했다.이제 어쩌지? * * 문을 닫게 된 아카데미를 나와 그를 따랐다. 누군가의 뒤를 졸졸 쫓아가는 건 오랜만이었다. 과거, 후만의 이후일까.따라오라고 멋대로 손을 내밀어놓고 후만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는 일이 없었다.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오고, 그러지 못한다면 두고 간다. 라고 등으로 말하고 있었지. 그 때는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 역시 누군가에게 정을 주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리라.반면 에르덴은,“뭐 하나, 꾸물꾸물. 막상 오려니 내키지 않나?”“그, 그런 거 아냐!”무심코 걸음이 느려졌다. 퍼뜩 고개를 들자 그와는 세 걸음 정도 벌어져 있었다. 허둥거리며 그의 옆까지 보조를 맞추자 그는 다시 걸음을 이어나갔..

심연의 서막 2017.07.20

챠콜의 편지 : 늦어!

: 레탈라 RE 세르벨리온 「레타!!!!!(잉크가 가득 꾹꾹하게 찍혀 있다)」「어째서 좀 더 일찍 말해주지 않은 거야? 갑자기 아, 이번에 국군의 정식기사가 되었습니다. 하고 말하면 놀라잖아. 그 사이에도 몇 번이나 더 말할 시간 있었는데 이제 와서야 말해주다니 너무해. 나도 걱정이라든지 응원이라든지 할 수 있다고. 이런 말 하면 레타는 또 걱정할 거 없다든지 답해오려나. 쳇.아무튼 축하할 일이네. 그래서 이건 레타 편지 받고 얼른 다녀온 거야. 멋지지! 내가 직접 사냥한 거니까. 레타의 말 듣자마자 곧장 서쪽 산에 올라서, 3일 걸려 잡아왔어. 히히. 황폐화가 심해진 건 정말 불편하네. 곰을 잡는 건 금방 끝났는데 그보다 국군이랑 용병 눈을 피해서 산에 들어가는 거랑, 곰 대신 몬스터랑 마주치느라 귀찮..

심연의 서막 2017.07.20

챠콜의 편지 : 에피 생일 축하해!

: 엘피시스 C. 아델하이트 「안녕, 에피. 잘 지내고 있을까? 기껏 보낸 편지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네. 곧 떠날 거란 말을 듣긴 했는데, 부디 당신이 아직 로제의 집에 머물고 있으면 좋겠어. 이번엔 모처럼 생일 선물도 준비했으니까. 기껏 준비한 거니까 에피가 편지보다 선물부터 먼저 뜯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법 고민했다고? 친구의 생일 선물이라거나, 처음 준비해보니까.짠~ 선물은 과자야. 직접 구운 거니까 로제랑 같이 먹어줘♪ 번개 모양이 꽤 잘 나왔다고 생각하는데 어때? 요즘 이것저것 요리에 취미가 붙었거든. 어쩌면 그만큼 여유가 생겼단 뜻인지도 몰라. 예전에는, 배만 채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지만 요즘은 맛도 제법 고르게 되었고.저번에는 베일까지 놀러와 줘서 고마워. 에피랑 같이 베일 관광해서 즐거..

심연의 서막 2017.07.20

챠콜의 편지 : 랏슈 생일 축하해!

: 아라슈 「안녕, 랏슈. 잘 지내고 있어? 나는 잘 지내. 이곳은 곧 곤돌라 축제가 열린다고 해! 덕분에 강의 양 편으로 곤돌라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엄청 장관이야. 길쭉한 곤돌라들이 알록달록하게 몸이 뒤집힌 채 햇빛을 받으면 꼭 강 양편으로 화단이 있는 것 같지 뭐야. 난 곤돌라라는 게 이렇게 종류가 많은지도 처음 알았어. 언젠가 랏슈가 놀러오면 내가 직접 운전을 해줄 수 있도록 배워볼까 봐!지난번에 보내준 차도 잘 마셨어. 에르덴도 좋은 차라고 칭찬해줬어. 아직 나는 차 끓이는 게 서툴러서-내가 끓였다간 찻잎을 쓰레기로 만들 거래-, 으음 차라는 건 심오한 거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카데미에 있을 때 시에나에게 좀 더 배워둘 걸 그랬나봐. 그래도 랏슈 덕분에 관심이 생겨서 카페에 나가서도 차를..

심연의 서막 2017.07.20

: 루 모겐스 『나는 늘, 네 곁에 있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맞잡은 손 위로, 살며시 닿아오던 입술의 감촉이 아직도 피부에 남은 듯 화끈거린다. 못 견딜 정도로 부끄럽게 해준단 말 이렇게 지켜버린 걸까. 정작 행한 그 당사자는 아무런 의식도 없던 걸 떠올리면 부끄럽다가도 우스워져 혼자 키득거리고, 에슬리는 마차의 등받이에 편히 몸을 기대었다.마차는 급하게 조달한 탓인지 착석감이 그리 좋진 않았다. 그러나 에슬리에게 마차란 그 자체만으로도 귀한 이동수단의 상징이다. 자동으로 움직이는 그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어느새 저 너머로 먹구름이 낀 하늘 아래 어딘지 을씨년스럽게 남겨진 아카데미 건물이 보였다. 이상하기도 하지. 아카데미는 자신들이 있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생겼는데 ..

심연의 서막 2017.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