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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03.20. 여정餘程과 여정旅情

더보기 11주차 리포트:: 한 주간의 일을 정리하기 위해서 에셸은 개인용 컴퓨터를 켰다. 이번 주의 룸메이트인 라하트는 자신의 자리에서 전략을 고민 중인 것 같았다. 제 룸메이트이자 라이벌이 챔피언 로드에 오르다니! 괜히 자신의 어깨가 으쓱이는 한편으로는, 그렇지. 조금 아쉽기도 했던 것 같다. 이번 주가 마지막이라고 목요일부터 시작해 3일 내내 체육관 도전으로 불태우던 이들을 따라해 볼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다. 어디까지나 생각이지만. 도전할 수 있을 때 도전해보자. 처음 캠프를 시작할 때부터 다짐한 신조는 마지막까지 목새 체육관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달성했다. 스스로와의 약속은 어기지 않았다. 아쉬움은 접어두고 대신에 6개의 배지를 반짝이게 닦으며 스스로를 칭찬해주기로 했다. “이거 보세요, 위키링...

85) 03.19. 스스로 선택하는 삶

더보기 둔치시티 의뢰, 어떻게 포켓몬 이름이 보리녹차 그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크루즈가 둔치를 떠나기 전에도 몇 번인가 그 아이들을 보러 다녀왔었다. 복수로 지칭해야 할지 단수로 지칭해야 할지조차 불분명한 인공 포켓몬, 헬릭스단에서는 카이브라라 부르던 포켓몬을 말한다. 현재 살펴주고 있는 레인저들 사이에서는 임시로 레온과 디어라고 부른다는 모양이다. 역시 두 머리가 취향도 다르고, 서로 독립된 의지를 가진 모양이니 복수가 맞을까. 캠프에서는 아이들에게 친숙한 이름을 붙여주자고 보리와 녹차로 하자는 둥,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귀엽거나 친근하거나 우스꽝스럽진 않은지 이런 이름이어도 괜찮은지 싶은 많은 이름들을 거론했는데- 그 전부를 그들의 이름 삼아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 아이들의..

84) 03.17. 티타임의 정석

더보기 다즐링 진화 둔치에 도착하자마자 다즐링은 골동품 포트를 선물 받았다. 에셸은 오랜 단골가게를 다즐링에게 소개하며 직접 마음에 드는 포트를 고르게 해주었다. 분홍색으로 새 칠을 한 다즐링은 당분간은 지금의 잔이 마음에 들어 몸을 옮길 생각이 아직 없었지만 애정이 가득한 골동품 다구를 보는 건 무척이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제 고스트 포켓몬들은 늘 저에게 사전 고지도 없이 멋대로 진화를 해버렸어요.” 다즐링이 고른 건 분홍색 도자기 포트였다. 이가 빠진 부분이 절묘했고 금이 간 자리에서 새어나가는 차는 향기로울 것만 같았다. 깨끗하게 닦고 깨진 부분을 다듬은 덕에 위험하지도 않았다. 분홍색 포트에는 제조연월도 적혀 있었다. 자기가 태어난 날을 알다니 멋진 포트네! 잔에 남은 차에 고스트 에너지가 모..

83) 03.17. 무사태평하고 성급한

더보기 프릴링 진화 살비마을의 얕은 바닷가를 돌아다니던 탱그릴에게는 아주 느긋한 꿈이 있었다. 언젠가 8000m 심해까지 잠겨 그곳에 자신의 서식지를 꾸미겠다는 꿈이다. 정작 이 무사태평한 포켓몬은 이제껏 깊은 바다를 한 번 나간 적 없으면서 파도를 타고 건너오는 이야기만을 들으며 상상에 잠기곤 했다. 언젠가 나도, 좋아하는 상대-먹잇감-와 함께 심해로 잠겨야지. 그것은 모든 탱그릴의 오랜 꿈. 그야말로 동귀어진이다. 어딘가의 파란 탱탱겔이 귀가 가려웠을지도 모르겠다. 오래되고 느긋한 꿈은 언젠가 이루어야지 하면서도 그게 언제인 줄도 모르고 내일로, 또 내일로 미뤄지고만 있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이루지 않을까? 그게 오늘은 아니지만. 내일쯤 오지 않을까? 안 오면 모레도 괜찮지. 따뜻한 살비의 바닷가에서..

82) 03.13. 비상

For.루버 더보기 소년과 손을 잡고 항구를 내려다볼 수 있는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그의 체력이란 한줌뿐이라 소년보다 서서히 뒤쳐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밧줄은 싫어요. 조그맣게 거부하면서도 꾸준히 힘겹게 걸음을 이어나갔다. 날씨가 화창했다. 바람이 잘 부는 계절이었다. 발 디디는 고도가 높아질수록 바다내음에서 멀어져, 바람에 점점 차갑고 시린 산의 냄새가 실려 갔다. 찬 공기는 몸을 가볍게 하는 힘이 있다. 산행을 하는 트레이너의 발걸음도, 따라 오르는 포켓몬도 부웅 떠오를까. 이 바람을 타고 소년의 수많은 포켓몬들은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을 차지하겠지. 날지 못하는 친구들도 물론 있었지만-소년은 날개보다 부리에 집중하곤 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주고 싶은 선물이다. 폴라가 아..

81) 03.12. 복잡하고 번거로운 인간의 삶

더보기 하가링 친밀도 로그 달링 파티에 새로이 들어오게 된 이 타타륜은 오랫동안 둔치항의 바닥에서 우두머리처럼 지냈다. 타타륜이 버티는 항구의 아래쪽은 어쭙잖은 포켓몬들은 가까이 오지 못했고, 덕분에 배가 편히 오갈 수 있었다. 그 중에는 달링의 배도 있었다. 심해 바닥에 가라앉아 해류에 쓸려가지 않게 닻을 박아 넣은 포켓몬은 굳이 물위의 인간들을 하나하나 기억하지 않았으나, 꼭 운명처럼 자신의 트레이너는 그 윤곽을 기억하고 있었다. 인간이 인간을 공격하고 멀쩡한 배를 터트리기나 하던 자리에 그 또한 있었기 때문이겠지. 그 뒤로 어린 인간이 바다나 배 근처에는 오지도 못하던 것이나, 그래놓고 극복을 하겠다고 바다 근처를 알짱거리던 모습, 결국은 조금 자란 인간이 스스로 배에 올라타 둔치를 벗어나던 걸 타..

80) 03.11. 난조와 만조

더보기 10주차 리포트 남 앞에서 컨디션을 티내지 말 것. 그렇게 가르침 받으며 컸다. 코트 위를 내려갈 때까지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사실 그건 별로 어려울 게 아니었다. 난감할수록, 난처할수록 부드러운 미소로 포장한다. 포장지 위로 예쁘게 리본까지 묶고 나면 대개 겉을 칭찬해주었다. 굳이 그것을 풀어 안을 보려는 사람은 없다. 그러면 그 사이 혼자 기분을 다듬었다. 어리광 부리지 말고 잘 서 있어야지. 잠시간의 기분을 이겨내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서 이렇게 마음이 힘든지. 힘들 때마다 북돋아주던 목소리들에 그새 익숙해져버린 걸까. 조금 우는 소리를 하고 싶다고 입술 안쪽을 가볍게 물며 에셸은 포켓몬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물이 들어차고 있었다. 발목을 집어삼키고 서서히..

79) 03.10. 리필 다즐링

더보기 다즐링 친밀도 로그 문전박대라고 해도 좋았다. 당당히 집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살금살금, 몰래몰래. 냐미링의 염동력으로 창문의 걸쇠를 열어 두 포켓몬은 겨우 에셸의 방으로 들어갔다. 가방 안이 부산스럽게 달그락거린다. 빨리 꺼내 달라고, 안 꺼내주면 저주해버린다고 징징거리는 바나링부터 코끝으로 톡 건드리고 이어서 저글링, 후와링, 다즐링까지 볼에서 나왔다. 하가링만이 웃어른답게 점잖게 볼 안에 있길 택했다. 제가 나가면 어떤 소동이 벌어질지 아는 것이지. 저로 인해 집이 무너져버리면 제 트레이너가 그렇게 꺼려하는 집에서 나올 수도 있겠지? 스케일이 다른 짓궂음으로 그런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었으나, 여기선 트레이너를 믿고 얌전히 있을 타이밍이다. 둔치항의 바닥을 지배하던 포켓몬은 때와 장소를 ..

78) 03.10. 굴러가는 행복의 방향은

더보기 서머링 친밀도 로그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본능적으로 피하지 않았겠지.」 「그러고 싶지 않는 게 맞나요?」 「금방, 다녀오셨으면 좋겠네요. …기다릴게요!」 여러 목소리들을 안은 채 든든하게 집으로 향했다. 한 번도 집에 가는 일이 두렵다거나 무섭다거나 심지어는 꺼려진다거나 한 적이 없었는데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아직 어떻게 하면 좋겠다는 결심은 내리지 못한 채 무거운 마음을 안고 대문을 넘어 현관까지 향하자 할머니가 바깥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서성거리던 할머니는 2달 만에 보는 손녀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셔서 에셸을 껴안아 왔다. “내 강아지, 바깥에서 험한 일만 당하고 와서 어쩌누. 아가.” 성인인 손녀도 그의 눈에는 마냥 ..

77) 03. 10. 사랑스런 대들보

더보기 저글링 친밀도 로그 샛별 체육관의 도전을 마치고 다음날의 한낮. 에셸은 우유푸딩을 만들고 있었다. 신선한 우유에 젤라틴을 녹이고 단맛을 조절하여 굳힌다. 어려울 것 없이 유리병에 몇 개나 되는 하얀 푸딩이 속속들이 채워졌다. 다 굳으면 캠프원들과 나눠 먹어야지. 만들다 남은 우유에는 과감하고 사치스럽게 홍차 잎을 듬뿍 넣고 끓여서 밀크티를 만들었다. 앵무새 설탕을 퐁당퐁당 넣어 홍차 향이 깊이 풍겨 나오는 그것을 후, 불어 마신다. 따뜻하고 달콤하고 노곤한 게 따로 천국이 없었다. 곁에서 밀탱크도 신선한 우유를 하나 퐁, 따서 꿀꺽꿀꺽 마신다. 에셸은 저글링 몫으로 피로슈키를 건네주었다. 그의 엔트리 중 인간과 비슷하게 식사를 하는 건 저글링과 서머링 뿐으로, 그마저도 서머링은 겉보기만큼 들어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