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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02.21. 사랑하는 저주

더보기 1 알속에서 머물던 당시의 기억들은 대개 분명하지 않다. 기실 이 작은 포켓몬은 그 당시의 기억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좋았어. 따뜻했지. 목소리가 들렸어. 날 기다려줬어. “러블링~” 그 정도면 충분하다. 어둠대신은 충분히 사랑받았고 태어날 때가 되어 마땅히 태어났다. 고스트 타입의 기원이 무엇인지, 저는 생물인지 혹은 천을 뒤집어쓴 에너지 덩어리인지 이 포켓몬은 관심이 없었다. 알 필요도 없었지.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그런 복잡한 사유를 하는 건 인간 정도가 아닐까? 알을 깨고 태어난 포켓몬은 단지 세상이 재밌었다. 세상이 즐거웠다. 2 처음으로 손을 갖고 싶다고 생각한 건 트레이너의 지나가는 말이었다. 「이 아이도 진화하면 멋진 두 손이 생기더랍니다. 분명 유니도 팔이 생기면 루미 씨를 안아주..

55) 02.21. 기원

더보기 8주차 리포트 여자는 리포트를 작성하고 있었다. 야심한 밤이었다. ・ ・ ・ 한 번 고스트 타입에 의문을 갖고 탐구하기로 마음먹고부터 에셸은 여러 책들을 살펴보고 자료를 모았다. 목새마을의 팔름연구소는 지질 전문이긴 해도 가벼운 교양 정도의 고스트 타입에 대한 책들은 있었는데 부족한 지식을 채워 넣기에는 이조차도 감지덕지하기만 해 머무는 동안 몇 번이나 팔름의 연구소를 들렀다. 특히 화석을 연구하는 곳인 만큼 팔름연구소는 고스트 타입에 대해서도 독특한 접근을 하고 있었다. 이 타입의 포켓몬들은 기원이 어떻게 되는지, 그에 관한 이야기다. 수많은 신화가 잠들어 있는 신오지방에 창조신이라 일컬어지는 포켓몬에 대한 전승도 전해졌다. 하나의 포켓몬이 세상을 창조한다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신화는 태초..

54) 02.19. 선을 이루는 것

For. 제롬 더보기 「소중한 타인을 잃는 장면에서는 꼭 비가 내리곤 한다던가요. 그에 비해……」 현실의 불행이란 극적이지 않은 법이다. 당신의 비극이 어떤 전조도 없이 일상에 그림자처럼 덮쳐온 것처럼, 나의 불행이 예고 없이 튀어나온 못에 걸린 것처럼. 때때로 에셸은 조명 받지 못하는 불행들이 이 넓은 세상에서 우리는 고작해야 점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 같다고 느껴졌다.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는 자리에서 수많은 개인이 각자의 불행과 고독한 싸움을 이어나간다. 그들 중 누군가는 싸움에 무릎 꿇고, 누군가는 무너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그게 참 공평하지 못하게 여겨졌다. 무척이나 쓸쓸했다. 그럴 때에 누군가 당신의 힘듦을 알아주고 위로가 되어준다면 우리는 좀 더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

53) 02.19. 페페링과 서머링

With. 미드서머 더보기 “찾는 인연이 있으세요?” 캠프 사람들 중에는 저마다 찾는 운명이나 인연이 분명한 사람들이 있었다. 에셸은 사실 포켓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해서 불켜미가 정말 영혼을 빨아들이는지도 알지 못하고, 흔들풍손의 손을 잡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사라졌는지 유의미한 통계를 내지도 못하고 타타륜의 본체가 사실 해초이며 그 닻은 해초가 엉긴 평범한 닻에 불과하다든지 하마돈이 거대코뿌리보다 무겁다는 것도 바로 얼마 전에야 알았다─그보다, 그런 거대한 포켓몬들의 무게를 비교하고 기억하는 건 어떻게 하는 일일까?─그에 비해 에셸이 포켓몬에 대해서 아는 건 위키링의 초에 닿아도 뜨겁지 않다든지 후와링은 사실 대단한 장난꾸러기라든지 저글링이 기차 멀미를 한다든지 냐미링이 저 몰래 꿈을 먹고 시치미를..

52) 02.18. 기록

For. 루미 더보기 「정말로, 루미랑 같이…… “집”에 가줄 거야?」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에게 여자는 도리어 웃었다. 제 웃는 얼굴이 아이의 눈물을 닦아내고 따라 웃게 만들길 바랐다. 「약속할게요. 같이 다녀오기로 해요.」 어린 마음에 비가 그칠 때까지 든든한 지붕이 되어주길 바랐다. ・ ・ ・ ──다라마을을 떠나 목새마을에 도착하고 다시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루미와 함께 소풍을 나서기로 하며 에셸은 아이의 손을 잡고 해루미 언덕 대신 시내의 상점가를 찾았다. 여기는 언덕 가는 길이 아닌데? 의아한 얼굴을 하는 아이에게 도착할 때까지 비밀이에요. 궁금해 하고 있을래요? 장난스럽게 웃으며 답을 해주지 않았다. 목새마을은 예부터 화석과 광물이 많이 나는 목새마을에는 액세서리 숍도 많았는데 그 중 한 곳을..

51) 02.17. 태양을 기다리며

For. 솔라리스 더보기 이곳, 트레이너 캠프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출신도 제각각, 연령도 제각각, 각자가 걸어온 길이 발자취로 남아 저마다의 개성을 뽐냈다. 어느 지방에는 발자국 박사라는 사람이 있어 남겨진 발자국만 보고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다지? 저에게도 같은 능력이 생기면 꼭 캠프 사람들에게 한 번씩 발도장을 찍어달라고 부탁하고 싶을 만큼, 캠프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로 빛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너는 빛났다. 모두가 자신의 개성을 갖고 반짝였지만 그와는 조금 다르게,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솔라리스Solaris. 태양을 가리키는 이름다운 휘광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처음에는 그런 네가 곤혹스러웠다. 다른 이유는 아니다. 단지 네가 만들어낼..

50) 02.15. 도전! 코뿌리 진정

더보기 목새마을 의뢰 코뿌리의 난동부리기 화석이 든 가방을 멀찍한 곳에 보내놓은 뒤 파피루스에게 연락을 했다. 또 코뿌리들이 날뛰면 알려달라고 했었지. 위치를 들은 파피루스는 곧 오겠다는 말을 남기더니 정말 순식간에 나타났다. 이 신출귀몰함은 레인저의 특성 같은 걸까? 상황을 살핀 파피루스는 짐짓 심각한 얼굴로 허리에 손을 올리고 상황을 설명했다. “와. 엄청 흥분해 있는데? 큰일이네. 일단 코뿌리의 힘을 어느 정도 빼놔야 진정제를 투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에셸! 도와줄 수 있어?”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연락을 드린걸요.” “역시 에셸이야!” 믿고 있었다는 저 해사한 미소를 보고 있자니 이제 와서 무르겠단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돕겠다고 말은 했으나 코뿌리의 정보를 다시 확인하면 자연스..

49) 02.15. 화석을 주우러 가는 길

더보기 목새마을 의뢰 과거에 살던 포켓몬 연구소 청소를 마치고 팔름과 한참 긴 대담을 나눈 뒤, 에셸은 포켓몬들과 함께 목새마을의 들판으로 향하였다. 대화를 나누던 중 팔름이 꺼낸 흥미로운 이야기 덕분이다. 「화석……인가요?」 「그렇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물론 발견되곤 하지만 특히 이 목새마을에서는 여러 종류의 화석이 발견되더군요. 그만큼 이곳의 지층이 다양한 시대를 어우르고 있는 것이겠죠. 만약 화석을 발견하면 가져와주세요. 사례비를 드리겠습니다.」 화석과 지층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의 팔름은 온화하고 연륜이 느껴지는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뜨거워 보였다. 헤이즐이 보여주던 타오르는 불꽃과는 다른, 이를테면 달궈진 돌을 닮았다고 해야 할까. 잘 달궈진 그것이 종종 보석처럼 빛나는 것처럼 그의 표정이 그랬..

48) 02.15. 다음을 기약하며

더보기 목새마을 의뢰:: 매캐매캐 연구소 날이 밝기 무섭게 에셸은 팔름에게 미리 선언한 것처럼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연구소를 찾았다. 연구소에도 물론 흥미가 있었고 팔름과의 대담도 그랬다. 특히 어제 들었던, 그가 트레이너에게서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에 대해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어느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하는 평정심일까요. 하하. 어느 정도 실력과 경험을 갖추지 못한 트레이너 분들은 땅이 조금만 흔들려도 당황하시거든요. 그러면 포켓몬은 더욱 무너지기 마련이지요.」 벤더는 포켓몬을 믿고 북돋아주는 트레이너를 좋아한다. 헤이즐은 포켓몬과 함께 격앙되는 성향을 선호한다. 로렐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로렐 본인에게 듣기론 포켓몬과 함께 즐거운 배틀을 하고 싶다고 했지. 팔름과 대화를 나..

47) 02.14.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더보기 7주차 리포트 목새마을에 도착한 날의 새벽, 그 날도 잠들지 않고 버티려던 에셸은 그만 몰려오는 잠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기차에 타야 한다는 부담을 넘어선 덕분일까. 그 날은 정말 오랜만에 깊이 잠이 들었던 것 같다. 포근한 이불에 감싸여 저보다 작은 아이와 한 온기를 나누며 에셸은 생각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가 좋아하는 책에서 나오는 구절이기도 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당장 내일에 들이닥칠 운명조차 모르면서 사람은 때론 어리석고 때론 탐욕스럽고 때론 비겁하고 때론 정의롭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언제나 늘 사랑이다. 사람을 내일로 데려가는 힘이었다. 에셸은 제가 받은 사랑만큼 이 품 안의 아이가 사랑으로써 살아가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