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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우리는 서로에게 증명해보일 수밖에 없겠구나.

: 장 디뉴엘 아인델은 야만적인 행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폭력은 하나의 수단이지만 옳은 답이 되지 않는다. 폭력으로써 이뤄내는 굴복은 진짜가 될 수 없다. 상대를 굴종시킨다면 다른 수단이 되어야지.그러니 아인델은 상대의 머리에 얼음물을 끼얹고 정강이를 걷어차며 그 목에 목줄을 걸어 당기는 일이 있더라도 폭력으로써 상대를 굴복시키려 하지 않았다.설령 상대는 다르다 할지라도.장 디뉴엘은 모순된 소년이었다. 소년의 악력에 끌려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고통 앞에 두 팔을 떨어트린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그 다음은? 붉게 부어오른 뺨이, 검은 손자국을 남긴 목이 새파란 불꽃에 휘감겼지. 네가 저지른 일을 마주 보지 못하겠니. 치료는 필요 없단다. 제 말은 늘 그에게 닿지 않았다.폭력은 수단이지만 답이 되진 ..

소멸, 탄생 2019.05.15

16. 아인델 아라크네가 여러분을 보호할 것입니다.

: 미션 로그 6 가이드의 손을 잡았다. 무슨 대단한 심경의 변화가 있던 것은 아니다. 필요하다면 취할 줄 알아야 한다. 고집부리지 말고.그 생각을 따라 아주 조금 도전을 해보았다.맑아진 컨디션으로 아인델은 쉴 생각 않고 곧장 개인 미션룸으로 향하였다. 오늘의 미션 내용은 사전에 고지 받은 상태였다. 가이드에게만 그런 미션이 주어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 손가락을 마주 깍지 껴 이리저리 잘 풀어주고 아인델은 홀로그램의 가동음과 함께 천천히 또 다른 현실 속에서 눈을 떴다.이것은 현실이었다. 언제든 어디서든 벌어질 수 있는 현실. 그러나 동시에 조작되고 의도된 것이기도 했다.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이 시험의 목적은 무엇일까. 모든 일에는 함유가 있기 마련이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명령에 복종하는 모습을 ..

소멸, 탄생 2019.05.15

15. 우리는 욕망을 가진 존재야, 네가 그렇고 내가 그렇지.

: 독백로그 밤공기가 미지근했다. 비가 오려는 걸까. 조금 습한 것 같기도 했다. 땀에 젖은 피부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차갑게 식은 그것이 끈적한 감촉을 남겼다.간질간질한 불쾌가 피부 위를 더듬어 오른다. 그 감촉이 꼭 수십 마리 거미가 제 피부를 기는 것 같았다. 두통이 일었다. 이유는 잘 알고 있었다.아인델은 한 번도 광기로 인해 먼저 가이드를 찾은 적이 없다. 그러나 가이드를 찾지 않고도 견고할 수 있던 건 그녀가 뛰어난 탓이 아니었다. 그저 이 공간이, 접촉하지 않아도 가이드의 영향력 안을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작을 뿐이다.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고 손을 잡고, 겨우 그것만으로도 아인델은 치유 받았다.참 편리하고 달콤하지. 정말 없어선 안 될 존재인 것만 같지.누군가는 그들을 충전기라고 했지. 누..

소멸, 탄생 2019.05.15

14. 내게 율은 누구보다 좋은 선택이 되겠지.

: 율릭 함메르쇼이 ───빛에 감싸인 기억이 있다.센티넬의 능력이 처음으로 발현되어 테스트를 치르러 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만을 보고 있었다. 시선에는 익숙하다. 비록 그 시선이 이제까지 받았던 우러러봄, 선망, 호의, 그 둥글던 것들과 전혀 다른 날카롭고 뾰족한, 언제든 제 몸을 찔러들고자 하는 것들이라 하더라도 아인델은 시선 앞에서 굽히는 법이 없었다.굽힐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떳떳했다.13살 어린 나이였다. 하지만 이미 권리를 알았고 의무를 알았다. 사명감이 있었다. 센티넬의 능력은 때문에 어린 그녀에게 어쩌면 당연히 주어질 것, 반길 것이기도 했다. 이 또 하나의 특별한 힘으로 주어진 의무를 다할 것이다.이제껏 한 번도 남에게 굽힌 적이 없었다. 떳떳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그 무릎..

소멸, 탄생 2019.05.15

13. 배움은 언제나 무용한 법이 없어.

: 미션 로그 5 지-잉.귀에 익은 전자음과 함께 서 있는 공간이 바뀐다. 제 발밑에는 두 자루의 권총, 눈앞에는 딱 인간 크기의 크리쳐. 의도된 것이다. 미션 내용은 사전에 들었다. 아인델은 곧장 발끝으로 권총을 차올려 손에 쥐었다.탄창 부분을 손바닥으로 받치고 한쪽 무릎을 앞으로 하여 무게 중심을 잡는다. 크리쳐는 아직까지 적의를 보이지 않고 어리둥절하게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 또한 의도된 것이다.총을 쏘는 법을 배운 적이 있다. 호신술의 연장이었다. 센티넬이 되기 전에도 그녀는 아스테반의 딸이었고 경호원이 늘 곁에 있다 해도 위급 시에 제 몸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배웠다. 총을 가르치면서도 아버지는 그녀의 은발을 쓰다듬으며 다정히 말씀해주셨지. 「네게 이 배움이 무용한 것이 되게 하겠다.」 고...

소멸, 탄생 2019.05.15

12. 네 저울에 나를 올려보렴.

: 챙 후이위 너는 몇 번이나 두려움을 말한다. 그러나 나는 네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다 이해할 수 없었다. 표면적인 것까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너머에 네가 어떤 경험을 하고 무엇을 억누르고 있는지까진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네게 답을 주는 건 내 역할이 아니다.네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선택하고 결정하는 건 온전히 너의 몫이다. 네 존재에 대한 책임이자 권리였다. 하지만,네 이능력을 떠올렸다. 폭식(暴食). 무엇이든 네 손으로 집어삼킬 것만 같은 새까만 탐욕. 네게도 분명 욕망이 있다. 많은 욕망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욕심내야 좋을까. 너는 그 방법을 잘 모른다고 하였지만 실은 알기를 두려워할 뿐이라 보았다. 선악과에 손을 뻗은 뒤 더 이상 좁은 낙원에서 살 수 없게 된 언젠가의 선조처..

소멸, 탄생 2019.05.15

11. 오늘도 내 뛰어남이 증명되었구나.

: 미션 로그 4 익숙한 시작음과 함께 서 있던 공간이 홀로그램의 가상현실로 바뀐다. 이번엔 아무것도 없는 넓은 방이었다. 아무도 없기도 했다. 이번엔 뭐지? 설마 며칠 열심히 했다고 이 방에서 정신 수양이라도 하며 보내란 것은 아닐 텐데. 그러나 정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홀로그램의 오류라기에는 공간이 해제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카메라는 변함없이 저를 기록하고 있었다.그렇다면 할 일은 하나다. 대비. 방비. 준비.큰 것이 온다. 그 하나밖에 예상할 수 없었다. 아인델은 실뜨기를 하는 기분으로 거미줄을 쳤다. 아주 촘촘하고 넓은, 무엇이든 감싸고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그물을 짰다. 보통은 제 몸보다 조금 더 큰 수준밖에 짜지 못하지만 시간이 많아서 그랬을까. 제법 커다란 거미줄은 아인델..

소멸, 탄생 2019.05.15

10. 의존하는 이는 누구니? 디뉴엘.

: 장 디뉴엘 닮은 색, 전혀 다른 온도, 아니 어쩌면 닮은 온도이면서 그러나 결국 맞지 않는 온도의 두 눈이 시선을 부딪친다. 너와는 어울리면 어울릴수록 서로에게 상처만을 남기는 것 같았다. 화상, 예상, 그렇게 서로를 소모시키기만 한다.그럼에도 부딪친다. 너를 납득시키고 굴복시키는 것이 내겐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너에게 증명해야 했다. 너만이 아닌 수많은 가이드에게, 수많은 인류에게.네가 굽혀온 만큼 곧게 허리를 편다. 두 손을 허리에 얹고 가슴을 내민다. 무방비하다고 해도 좋은 자신에 찬 자세였다. 어떤 시선 앞에서도 나는 당당했다.완전무결의 거미, 아인델 아라크네다.“인류를 위해 일한다 해도 그것은 내 선택이란다. 내가 가진 능력을,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 다만 그 일이 숭고하기 때문에..

소멸, 탄생 2019.05.15

09. 나는 조용한 것이 좋아.

: 미션 로그 3 적절한 시기라는 것이 있다. 무르익은 때라는 것이 있다. 과실이 가장 맛있게 익은 순간, 흔들리던 수면이 고요하게 멎는 순간, 사냥감이 과녁에 들어오길 숨죽이고 기다리다가 명중시키고 마는 순간, 그 시기란 너무 조급해서도 안 되고 늦어서도 안 된다. 그렇기에 어려웠다. 완벽한 타이밍을 잡기란.어려운 것이지만 아인델의 특기이기도 했다. 서두르지 않고 가장 좋은 타이밍을 맞추기.그녀는 스스로 급박한 상황, 1분 1초를 겨루는 상황에 맞지 않음을 안다. 예를 들자면 어제의 훈련과 같은. 맞지 않다고 못한단 뜻은 아니다. 언제나 상황이 제 원하는 대로 돌아가주지 않는단 것쯤은 알았다. 그렇지만 역시, 이왕 움직일 거라면 베스트를 취하고 싶었다.그 점에서 오늘의 훈련은 반가운 것이다.“시끄럽구나..

소멸, 탄생 2019.05.15

08. 잘했어, 챙.

: 챙 후이위 대화가 유독 길어지고 있었다. 대화 사이의 침묵도 그만큼 길었다. 나는 너를 기다렸다.하나의 주제의 꼬리를 물고 다시 그 다음 꼬리를 물고, 너와의 대화는 내게도 유익한 기억이었다. 싫지 않았다. 아니, 좋아하는 쪽에 속하였지. 내 말은 곧잘 사람들의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오해를 사지 않고 말하는 법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타인의 오해 따위로 흔들리지 않는다. 정말 오해였을까? 다만 오만일지도 몰랐다.너는 쉽게 도망쳤다.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굴다가 사람 손을 가리는 강아지마냥 쪼르르 멀어지는 일이 순식간이었다. 그런 네가 나와 대화를 할 때는 꾹 참고 한 문장, 한 단어, 마침표까지 더듬거리며 입술을 움직이는 일이 퍽 기특했다.「잘했어, 후이위.」네 노력에 나는 칭찬을 ..

소멸, 탄생 2019.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