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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BERTAS

: J. 디셈버 윈터가든 [ 문학 수업을 마치니 몸이 아닌 마음이 노곤노곤해 집니다. 기숙사로 돌아와 씻자마자 바로 누워버렸습니다. 내일은.. 무슨 수업이 있더라… ]메모지 한 장과 지도 한 장, 어라. 우리 이런 건물에서 지내고 있었구나. 매번 안쪽을 정신없이 돌아다니기만 했지 평면도는 처음이네. 신기한 듯 지도를 이리저리 비추다가 아, 하고 동그랗게 만 주먹으로 손바닥을 두드린다.“그러니까 이걸 들고 기숙사로 향하라는 거지? 그야, 기숙사는 맨날 가던 곳이긴 한데~…….”무슨 꿍꿍이인 걸까. 이 과제를 끝내면 펜듈럼을 선물해준다는 것 같긴 한데, 이번 과제의 목적은 복합 활용이었지? 과연 내가 할 수는 있는 건지. 안경 너머로 늘 보이지 않는 그의 눈동자를 상상하며 의구심을 안고 일단은 강의실에서 발..

심연의 서막 2017.07.20

Are you my father?

: 에르덴 루미얀체프 『자네는 부모자식이란 관계에 대해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인가?』의미를 부여해? 누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박장대소를 하고 웃어준다. 피붙이라고 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할까. 자기가 급할 땐 죽이든 버리든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때로는 차라리 남만도 못한 관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것이 어느 것은 안 그렇겠냐만은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부모자식이란 관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할 수만 있다면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왜 버렸냐고 묻고 싶을 테니까. 혹시 나는 쓸모가 없었던 건지, 나를 바라지 않았던 건지. 나도 당신들만 있었더라면──, 당신들만 날 당당하게 받아들여주었더라면 사일란이든 뭐든 기꺼이 받아들였을 텐데. 당신..

심연의 서막 2017.07.20

변화

───멀리서부터 쏴아아, 하고 빗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날짜를 확인한 에슬리는 슬슬 바위사막에 우기가 찾아올 시기임을 떠올렸다. 어제 오랜만에 용병단에 연락을 해본 탓일까.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사막에서 한참 먼, 정 반대편의 땅임에도 불구하고 몸의 기억이 남은 모양이다.아카데미 바깥의 정세는 어수선한 것 같았다. 전쟁이 끝나고 안정을 찾기 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사막에서 벼려진 감은 곧 피 냄새를 맡게 될 것이라 예고해주었다. 이곳에서의 평화로운 생활도 머지않은 모양이다. 기껏 마음에 들었는데.창가에 달라붙어 잠깐 고민하다가 제 옆에서 새근새근 잠든 룸메이트를 보고 창문 열기는 참기로 한다. 곤히 잠든 친구를 엘버의 찬바람으로 괴롭힐 수는 없지. 대신 유리창에 얼굴을 붙이고 하늘을 올..

심연의 서막 2017.07.20

이변

기숙사의 제 방, 침대에 엎드린 채 통신석을 손바닥에 굴린다. 저렴한 것은 아니지만 용병단에서 일을 하다 보면 비상연락망 용으로 하나씩 쯤은 구비하고 있기 마련인 것이었다. 후만이 죽고, 용병단에서 나와 실베니아로 향하면서 이제 이걸 사용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 왔었지만……, 크루엘라에서 조우한 대형변이종과의 전투, 마을에 내려갔을 때 들은 부산스러운 군의 움직임과 이해할 수 없는 대피령. 무슨 이변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 통신석을 움직여 작동을 시켜보았다.상대는 그녀가 몸을 담고 있던 용병단의 부 리더. 언제나 주먹구구식으로 단순하고 명쾌하게 움직이던 리더와 달리 머리가 잘 돌아가고 정보 수집을 좋아하던 사람이니 이번 일에 대해서도 뭔가 알고 있겠지. 지금 이 시기라면 커다란 ..

심연의 서막 2017.07.20

레타

: 레탈라 RE 세르벨리온 “그렇게, 부끄럽습니까?”“~~! 왜 레타는 태연한 거야…….”저와는 달리 여전히 웃음기가 드리운 채 물어오는 그를 보며, 그러니까 이 친구는 제 생각보다 더 천연덕스러운 모양이라고 에슬리는 깨달았다.「나랑 펭귄 같이 보러 가기로 한 거 아니었어?」「저는 도움. 이라고 하지 않았나요?」처음엔 어딘지 선을 그어놓은 듯 한 발짝 건너에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 저렇게 능청스러워진 걸까. 정말 모르고 저러는 건지 알고 저러는 건지도 짐작이 가지 않아 에슬리는 그저 눈가에 오른 열을 손등으로 문질러 식히기 바빴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문득 무구하게 빛나는 연두 빛의 눈동자와 마주치면 가슴 한 구석이 차가워졌다.『챠콜이 무서운 게 나온다면 제가 다 이겨줄게요.』내가 무서워하는 게 당신이면 ..

심연의 서막 2017.07.20

축제의 밤

: 루 모겐스 축제의 밤은 식을 줄을 몰랐다. 타닥타닥하고 불꽃이 피어오르는 광장에서 가면을 쓴 사람들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추면 가장자리에 앉은 악단이 사람들의 춤에 맞춰 즐거운 음악을 연주해주었다. 즐거운 듯한 웃음소리와 스텝을 밟는 구두 소리, 악기 소리와 모닥불이 타는 소리까지 어느 것 하나 흥겹지 않은 것이 없었다.“한 곡 추시겠어요?”이 날 추는 춤은 사람들의 안녕과 무운을 기원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안녕만이라면 몰라도 어째서 무운일까? 하지만 왠지 모르지도 않을 것 같았다. 여기서 나가면 금세 척박한 겨울이 기다리고 있었고, 겨울은 하루가 다르게 성큼 마을을 덮치고 있었으니까. 에슬리와 아카데미 사람들이 이곳에 방문한 것도 본디 그런 이유였다. 언제 마을을 덮칠지 모를 몬스터에 대한 불안..

심연의 서막 2017.07.20

펭귄 가면

새벽부터 이동한 끝에 저녁 무렵에는 베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동쪽에서부터 실베니아로 향하는 동안에는 오로지 목적지만 보고 가느라 다른 곳은 전혀 구경할 여유가 없었던 탓에 에슬리로서는 제대로 구경하는 첫 서쪽의 도시였다. 베일은 관광지로 유명한 도시답게 저녁임에도 곳곳에 등불이 밝혀져 떠들썩한 목소리로 가득했다. 건물 사이사이로는 강이 흐르고 있었고 강 위로는 독특한 모양의 작은 배가 끊임없이 오갔다. 제가 지냈던 시궁창 같이 더럽던 뒷골목이나 기계로 가득해 쇠 냄새가 나던 곳, 혹은 아무것도 없고 있는 것이라곤 바위와 모래투성이던 세계와는 너무나 다른 깨끗하고 아름다운 도시 풍경에 에슬리는 넋을 잃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바빴다.“굉장해!”이곳에 온 본래의 목적 따위 출발하기 전부터 이미 잊은 지 오래..

심연의 서막 2017.07.20

장미의 이름

: 레탈라 RE 세르벨리온 이날 아침도 에슬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새벽 공기를 마시며 산을 돌아보고 있었다. 겨울바람이 가시지 않는 산은 이곳에 온 지 몇 달이 지났음에도 에슬리에게 마냥 신기한 공간이었다. 근 10년을 사막에서만 보낸 그녀에게 계절이 달라져도 눈이 사라지지 않는 땅이란 아무리 둘러봐도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하곤 했다.이날 에슬리의 눈을 사로잡은 건 절벽의 조금 튀어나온 모서리 부근에 피어 있던 꽃이었다. 바위에 둘러싸인 그 작은 공간에서도 꽃이 필 수 있다는 것에 1차로 놀랐고 그 꽃이 희귀한 장미임에 2차로 놀랐다. 이곳은 마법사가 많은 도시니까 어떤 호기심 많은 마법사가 눈 속에서도 틔울 수 있는 꽃씨를 뿌리고 간 것일지도 모르지. 경위가 무엇이든 중요한 건 에슬리의 눈에 흔히 볼 수 ..

심연의 서막 2017.07.20

무제

: J. 디셈버 윈터가든 “───그 수천이 원하는 대로 살아주기라도 할 참인가요?”아니잖아요. 느리게 덧붙여오는 말에 생각하기보다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수천이, 다시 수만이 제 머리를 잡고 내리찍으려 들었다. 그 때마다 자신은 필사적으로 목에 힘을 주고 쓰러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발버둥을 쳤지. 제 머리를 누르는 손들에겐 한낱 버러지의 발버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자신은 진흙탕을 뒹굴면서도 이렇게 살지는 않겠다고, 내 삶을 택하겠다고 도망쳐 나왔다.그럼에도 불구하고,“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휘둘리는 건 내가 약한 탓이야?”아직 견고해지지 못한 걸까. 사람의 정 앞에 금세 마음을 열어버리고, 누군가가 내밀어주는 손을 거절할 줄도 모른다. 나 하나의 믿음이면 충분하다고 강해지기보다 누군가 내 편을 들어..

심연의 서막 2017.07.20

대답 안 해, 아니 못 해

: 에르덴 루미얀체프 더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누그러진 반응이 돌아왔다. 대신에 들려온 건 어렴풋하던 중얼거림. 혹시 연구 때려 치라고 하면 어쩌지? 묶어놓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걸 보면 그러진 않을 텐데. 혼자 걱정하며 신랄한 말이 돌아올 줄 알고 잔뜩 긴장했던 어깨가 조마조마하게 내려간다.“새로 만든 연고네. 조금은 더 빠르게 들었으면 좋겠군.”그렇게 방심하고 있던 찰나에 그악스러운 손아귀가 제 팔을 꽉 붙잡아 당겼다. 으어어, 불시에 균형을 잃고 이끌려가자 상처 난 곳 위로 뻑뻑한 연고가 발린다. 이왕 해줄 거면 좀 살살 해주지. 말해도 소용없을 걸 아는 투덜거림과 함께 억센 손에 연고가 발리는 걸 물끄러미 쳐다보며 재잘거렸다. 이번 건 무슨 성분이 들어갔어? 이거 바르면 상처가 금방 나아? ..

심연의 서막 2017.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