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860

J. 디셈버 윈터가든

: J. 디셈버 윈터가든 「앎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그래도 묻고 싶습니까?」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망설임은 없었다. 순전히 호기심만이었다면 여기까지 닿지 않았을 테지. 그의 말처럼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만큼의 책임이 따르는 일이니까. 그러나 에슬리 챠콜에게 눈앞의 남자, J. 디셈버 윈터가든은 단순히 호기심만으로 대하는 상대가 아니었고, 때문에 그녀는 그의 문을 두드렸다. 알기를 청했다.검은 레이스의 안대 너머로 어렴풋하게 붉은 시선이 닿아온다. 고요하게 내려앉는 시선은 시선을 주는 주인과 닮아 있어, 이름처럼 얼어붙은 겨울이 아닌 벽난로의 불꽃과 같은 온기가 감도는 시선을 익숙하게 받으며 에슬리는 나긋나긋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내가 나브람이 아니라는 것은 눈치 채고 있었을 ..

심연의 서막 2017.07.21

당신의 상냥함에 기대어

: 루 일크누르 모겐스 “…너를 괴로운 채로 내버려두고 싶지 않아.”그 말은 어떤 연유에서 나온 것일까. 나를 동정해서? 아니면 당신도 나와 같아서. 닮은 괴로움을, 슬픔을 안고 있어서? 당신은 언제나, 그렇게 나를 이해해주지.“혹여 내가 너의 이야기를 듣고 불행하더라도… 너의 고통을 모른 채 내버려두고, 나중에서야 후회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그런 말을 들으면 기대지 않을 수 없는데. 정말 과거에 내게 다정하게 군 것도, 지금 내게 상냥하게 대한 것도, 후회하지 않을 거야?“울지 않아. 말해줘.”정말로 울지 않을 거야?은색의 시선이 살며시 내리 닿는다. 다가오는 눈동자에 나는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기도라도 하듯 당신의 두 손을 감싸들어 이마에 가만히 기대었다 내려놓고는── 당신이 그렇게 말해주는 ..

심연의 서막 2017.07.21

이유

밤이 되면 붉은 등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르는 거리가 있다. 제국의 꽃, 혹은 밤의 태양이라 불리는 이트바테르. 그 중에서도 어느 한 골목, 화려하고 눈부신 홍등가의 뒤편에서 쓰레기로 쌓은 탑을 지나 거기서 다시 짙게 드리운 그림자 너머를 살펴보면 아이가 있었다.웅크린 아이다. 넝마에 가까운 옷, 고약한 냄새, 달 부스러기가 떨어진 듯 노란 빛이 드문드문한 짧은 머리카락은 기름과 흙과 핏자국으로 엉켜 있었다. 흘긋 고개를 들면 엉망이 된 얼굴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운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이미 울기엔 무뎌졌을 뿐이다.아프지 않다는 건 편리하다. 때리는 사람의 입장에서. 아이는 입술을 깨문 채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러면 낄낄 웃으며 그들은 폭언을 날렸지. 역시 사일란이야. 재수 없는 것. ..

심연의 서막 2017.07.21

울지 마

: 얀 ───울려버렸다.다른 무엇보다도 앞서 머릿속에 든 생각은 그거였다.에슬리 챠콜은 운다는 상태에 취약하다. 제가 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상태임이 틀림없고 하물며 상대가 울면. 스스로도 이해 못하는데 남의 눈물을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달래주어야 하나? 하지만 어떻게? 애초에 왜 우는 거지?? 내가 뭘 했어?“에슬리, 내가 싫죠?”“시, 싫을 리가 없잖아???”어째서 거기서 그런 말이 나오는 거야. 바보 같은 사람. 애초에 정말로 싫었다면 먼저 말을 걸지도, 이런 영문을 알 수 없는 선문답에 어울려주지도, 무엇보다 당신 때문에 화를 내지도 않았을 거야. 아아,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발을 동동 굴리다 두 손을 뻗어 남자의 양 볼..

심연의 서막 2017.07.21

세 번째 질문

: 얀 “흐음…….”나지막한 목소리가 당신의 말을 따라서 목 안쪽을 울린다. 수치, 부끄러움, 자존심, 당신이 언제나 중요시 여겨오던 것. 그럼에도 당신이 다 망한 집에 나를 초대해주었기에 아직 괜찮은 줄로만 알았다. 아니었던 걸까. 혹은 그 뒤로 무언가 더 안 좋아졌던 걸까. 어쨌든 좋다. 모른 척 하려는 이유는 알았어. 하지만,손가락으로 천천히 짧은 머리카락을 꼬다가 내린다. 머리카락의 감촉이 남은 검지, 그 다음으로 중지를 차례로 펴며 숫자를 헤아린다.“이제 마지막 질문인가.”질문일까. 질문이 아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괜찮지? 난 언제나 당신의 말을 듣지 않는 사고뭉치였잖아. 5년 사이 퍽 달라진 표정으로 눈웃음을 치며 세 번째를 꺼낸다.“나를 뭐라고 부를 거야?”아주 중요한 거야. 잘 생각해야 해..

심연의 서막 2017.07.21

의미

: 얀 「챠챠.」마지막으로 불러주던 그 목소리와 지금이 다르지 않은데.“지금 가만히 있으면 챠챠라고 불러줄게요.”눈앞의 당신은 다른 사람이라 주장을 한다.불쾌해.불쾌해. 불쾌해. 불쾌해.아아, 정말──너무나도 불쾌하다.그의 손에 들린 붉은 리본도, 모르는 사람을 보는 척하는 눈도, 어울리지 않는 말투도, 툭 덮인 이마의 머리카락이나 우스꽝스럽게 스스로를 낮추려 하는 몸짓까지.불쾌해.고양이가 부러웠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요. 찡그린 그녀의 표정을 무시하며 다가오는 손을 짜증스럽게 쳐냈다. 그런 게 아냐. 누가 고양이 따위 부러워할 줄 알고. 고양이 따위 부러워할까보냐. 멋쩍은 기색으로 그는 리본을 자신의 손목에 감았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마치 어색하고 민망한 이 기류를 어떻게든 외면하고자, 그러다 툭 흘러나..

심연의 서막 2017.07.21

재막

『만약에 내일 세계가 멸망한다면──,』 그럼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어야 하나? 굉장히 희망이 넘치는 발상이야. 만일 내일 세계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심은 사과나무는 싹이 날 테니까. 하지만 사과를 심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겠지.나는? 아하하, 나라면 펭귄을 보러 갈까. 서쪽으로, 또 서쪽으로. 해가 지지 않는 곳을 향해 끊임없이 걷는 거야. 그러다 운이 좋으면 내일이 오지 않을 수도 있고 반대로 가다가 펭귄을 만나기도 전에 지쳐서 쓰러져 죽을 수도 있겠네. 어쩌면 이 별이 네모났다는 증거를 눈으로 볼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걷고 또 걷고, 세계가 끝나든 내가 끝나든 결말을 볼 때까지 걸어야지. 정말 펭귄을 보러 가는 게 맞느냐고? 글쎄~, 어떨 것 같아? * * 잠에서 깬다. 바깥은 어..

심연의 서막 2017.07.21

한 발자국의 거리

: 루 일크누르 모겐스 “그렇다면 지금 말해볼까? 네가 내 곁에 있기를 바라지 않는다고.”듣고 싶은 답이 있었다.“나는 이대로 충분하다고.”비겁한 질문이었다.“어떻게 판단이 설지 알 수 있을지도.”욱신─,통증을 느꼈다. 약은 짓을 한 벌이다. 쓰게 웃으며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참 피곤한 태생이구나.」그건 누구에게 하는 말이었을까.「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 무턱대고 다정함을 베풀다가는 언젠가 그 무게에 짓눌려서 힘들지도 모른다… 라고.」과거에 베풀었던 다정을 후회하고 있어, 루? 내가 당신을 힘들게 하고 있을까. 눈가에 열이 오른다. 부끄러움, 가벼운 후회, 혹은 속상함, 그것도 아니면 두려움, 여러 감정이 뒤섞여 고개를 떨구었다. 손등으로 가볍게 누르자 손의 체온이 더 높은지 ..

심연의 서막 2017.07.21

: 루 일크누르 모겐스 “내게 먼저 다정했던 건 당신인걸.”나는 그저 받은 것을 되돌릴 뿐이야.발자국은 나란히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도 좋지만, 나는 당신의 바로 앞에 마주 서 새 발자국을 남겼다. 그리고는 당신의 머리색처럼 어딘지 뿌옇게 흐릿한 미소를 바라보며 먼저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와 닿는 것은 변함없는 온기. 지금은 내 쪽이 조금 더 체온 높을까? 바깥을 걸은 탓인지 살짝 뻣뻣해진 손가락을 꼭 감싸 쥐고는 까만 눈동자 안에 당신의 표정을 담는다.당신의 머릿속에 어떤 지독한 태풍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걸까.“내가 경멸하거나 두려워할까봐 무서워?”내가 당신의 말을 듣고 곁을 떠날까봐 두려워? 느릿하게 질문을 던진다. 표정을 읽어본다.그렇다면 루, 나는 곁을 떠나지 않아. 떠날 걸 걱정할..

심연의 서막 2017.07.21

에슬리 챠콜 씨의 일일

1803년공부를 방해한다고 언니가 못마땅하게 보면 어쩌지? 그치만 여기 디저트, 꼭 소개해주고 싶었어! 어때, 맛있어?또 이사? 당신 집으로? ……알았어.우리, 실베니아로 가던 길에 만났던 거 기억해? 그 때 말이지, 난 솔직히 아카데미 같은 곳 왜 가는 걸까 이유도 모르고 무작정 움직이고 있었어.다음에 또 초대해주면 좋겠다. 그 땐 어머니한테 줄 선물도 가져갈 거야. 어떤 걸 좋아할까? 으음~, 지금부터 고민할 것 같아. 1804년어째서 좀 더 일찍 말해주지 않은 거야? 갑자기 아, 이번에 국군의 정식기사가 되었습니다. 하고 말하면 놀라잖아.당신을 뒷배로 삼을 거니까, 그 때까지 기다려줘야 해.누군가 내 행복을 빌어준다는 게 든든하다는 것도. 그러니까 나도 이곳에서 여전히 당신의 행복을 바라고 있다는 ..

심연의 서막 2017.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