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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일상

: 루 모겐스 쿠션을 껴안은 채 책장을 넘긴다. 이 집에는 수많은 책들이 있었지만 그녀가 읽을 수 있는 건 그 중에서도 몇 권 되지 않아,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직접 가져온 가벼운 풍의 소설이었다. 책을 읽으면서도 영 내용에 집중이 되지 않아 팔랑팔랑 넘어가는 책장과 달리 머릿속은 다른 생각이 퐁퐁 굴러갔다. 약초밭에 물은 줬고, 저녁은 뭘 만들까. 두 사람은 언제쯤 돌아온다고 했더라. 귀찮은데 나가서 먹고 들어올까. 아~…, ……심심해.그 때였다. 느긋한 발소리가 들려온 것은. 반사적으로 책을 덮고 귀를 쫑긋 세운다. 발소리가 계단을 올라 점점 문으로 가까워지는 동안 에슬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문고리에 집중했다. 달칵, 하고 문이 열리자 기다리던 얼굴이 나타났다.다녀왔어, 루? 들뜬 목소리를 숨기지 ..

심연의 서막 2017.07.24

있을 수 없는 꿈

: J. 디셈버 윈터가든 문득 의식이 들었을 때, 그녀는 디셈버 위에 올라타 있었다. 어라?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그의 위에 올라앉은 채 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왜? 하는 의아함. 내가? 하는 불신. 손가락이 파고드는 살갗이 서늘하다. 평소에도 그의 체온은 언제나 저보다 낮았지만 어쩐지 시체라도 되듯 차갑고 건조했다.하얀 목 위로 제 열 개의 손가락이 단단히 파고들어 붉은 자국을 남긴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재차 물었지만 답해주는 이는 없었다. 대신 들려온 건 엉뚱한 말. 힘을 줘야지. 억눌린 목소리가 평소의 듣기 좋은 미성과 다르게 바닥을 긁듯 거칠게 새어나온다. 얕은 숨은 코앞을 스치며 닿지 못하고 흩어졌다.「……목을 조르는 것은, 번거롭습니다.」몇 번을 끊어 겨우 완성된 문장은 그녀..

심연의 서막 2017.07.23

인생의 회전목마

: 루 일크누르 모겐스 어느 온화한 밤이었다. 갑작스레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니, 문이 아니라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 갸우뚱거리며 창문 쪽으로 시선을 두자 테라스에 그가 서 있었다. 가벼운 미소와 함께 그가 수신호를 보낸다. 나오겠니? 시키는 대로 걸쇠를 풀어 창문을 열자 그는 무언가 꾸미는 듯한 표정으로 지난번에 그 옷 있지. 하고 물어왔다. 그 옷? 무슨 옷을 묻는 걸까 고민하자 지난번 파티 때의 그거, 하고 설명이 덧붙는다.아아. 끄덕이고 2차로 있지만, 그래서? 묻자 루는 입고 나와 줄래? 여전히 이유는 말해주지 않은 채 눈 꼬리를 휘며 웃었다.무슨 생각인 거지. 이유를 묻기는 포기하고 창문 위로 커튼을 친다. 시키는 대로 까만 드레스를 입고 나가자 난간에 기대고 있던 그가 우..

심연의 서막 2017.07.23

상념

방에서 쉴 기분이 아니었다. 정원의 눈밭을 밟고 익숙하게 나무 하나를 붙잡아 걸터앉는다. 거추장스러운 다리 갑주는 나무 아래에 던져놓고 발가락을 움직여 두 다리를 모아 웅크린다. 습관처럼 목가에 손톱을 세우려다 잡아주던 손을 떠올리며 간신히 참아내고 아, 아직 이 정도 여유는 있나보네. 혼자 웃음을 터트리다 곧 무릎에 이마를 문지르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통각이 둔해지는 현상 정도는 완화 시킬 수 있는 내용이군.」사일란으로 태어나 이제껏 통각을 느끼지 못하는 몸을 불편하게 여긴 적은 한 번도 없다. 제 삶에 있어서 그것은 차라리 이점이었지 단점이 되진 못했다. 오히려 느끼지 않을 수만 있다면 발작 때마다 느끼는 통증조차 지워버리고 싶을 지경인데.통각과 노화, 그것을 인간다움이라 여긴 걸까 그들은. 새삼..

심연의 서막 2017.07.21

오빠

: 모렌 카리시아 “챠콜 씨, 저는 많이 지쳤습니다. 이제 그만 정리하고 싶은 것뿐이에요.”그 말은 이제까지 이어지던 대화 중 가장 그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5년 전에는 곧잘 보이던 유하게 휘는 눈웃음에 저도 모르게 마음을 놓으려던 그 때, 느릿한 목소리로 그가 절망을 고한다.“부탁합니다. 제게 희망을 품게 하지 말아주세요.”……모르지 않는 심정이었다. 그녀 또한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희망을 품는 것조차 비참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던 기분.이 세상에 정말 신이 있다면 아마도 그 자는 성격이 아주 고약할 것이라고 에슬리는 몇 번이나 떠올렸다. 기도하는 자에게 복이 온다고? 웃기지 말라지. 그녀가 살면서 지켜본 세상은 간절한 자에게서 더 간절한 것을 빼앗고 불행한 자에겐 더한 불행을 안겨주었다. 그..

심연의 서막 2017.07.21

소중했던 것들에 관한 이야기

: 아라슈 그 아이에게선 언제나 햇빛을 머금은 잎사귀나, 부드러운 바람, 젖은 흙과 같은 냄새가 났다. 곁에 있으면 호흡이 편안해지는 맑은 공기가 풍겼다. 5년 전 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조금 여린 듯 보이는 날개에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어느새 쑥쑥 성장하여 제 위로 파랗고 넓은 날개를 드리우게 되고 말이지. 조금 감탄해서 보고 만다.하늘 조각을 떼어온 듯 태양을 가리는 새파란 날개 아래로 녹색의 장난스러운 눈동자와 눈이 부딪쳤다. 맞닿은 이마에서 퍼지는 옅은 온기, 머리칼을 살랑거리는 바람, 이렇게 가까우면 좀 부끄러운데…… 그러면서도 물러서지 못하고 그의 앞에 잠자코 있는 건 단순히 익숙해졌다기엔 조금 다른, 그가 말한 것처럼 유대감의 힘일까. “역시 궁금해졌어. 에슬리의 옛날 얘기. 해줄래..

심연의 서막 2017.07.21

선물

: 네펠레 코라이 차츰차츰 달라지던 눈높이가 어느새 역전되어버렸다. 그래봐야 나란히 섰을 때 티도 안 나는 수준이지만, 길게 넘실거리는 하늘 빛깔의 옆에서 눈으로 좇으며 에슬리는 한 번 더 5년의 시간을 실감했다. 방문이 열리자 안쪽에서는 네펠레가 말해준 것처럼 좋은 향이 났다. 향의 근원지를 찾아 두리번거리자 한쪽에 매달린 포푸리가 보였다. 귀여운 주머니네. 슬며시 웃으며 걸어 들어가자 네펠레는 조금 부산스럽게 차를 끓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방 안은 과거에 방문하던 곳과 공간만 달라졌을 뿐 분위기는 그대로인 것 같았다. 잠이 잘 올 것만 같은 푹신한 이불과 쿠션, 그 옆으로 그녀의 다양한 취미가 엿보이는 책들이 꽂혀 있었다. 여전히 사랑스러운 방이네. 하고 웃음 짓다가 어라, 저 커다란 악기는 뭐지? ..

심연의 서막 2017.07.21

고백

: 루 일크누르 모겐스 팔에 당겨져 당신의 품에 들어간다. 사과, 감사, 이름을 반복하는 목소리에 당신의 머리를 천천히 토닥여주었다. 따뜻한 숨결이 어깨에 닿고 있었다. 응, 나는 이걸로 충분하니까. 당신은 부디 목소리에서 슬픔이 가시길.“루는 여전히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네. 그럼 내가 루의 옆에서 당신이 좀 더 자신을 갖도록, 괜찮다는 확신을 갖도록 몇 번이고 말해줄게. 당신은 언제나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야.”추하거나 이기적이거나 유약하거나, 어쩔 수 없어도 괜찮아. 루에겐 장점도 가득하니까. 나지막이 말을 마치고 작게 한숨을 내쉰다. 당신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버리고 만 탓이지. 조심스럽게 당신의 품에서 벗어나 눈을 마주친다.무어라 말을 하면 좋을지 잠깐 입술을 달싹거리다 재차 ..

심연의 서막 2017.07.21

루 일크누르 모겐스

: 루 일크누르 모겐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누군가 머리를 한 대 때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뇌가 뒤흔들렸다. 약간 멍했고, 들려오는 단어의 의미가 잘 파악이 되지 않았다. 마치 외국의 언어라도 들은 양 해석이 되지 않았다. 이해는 한참 후에, 받아들일 여유도 없이 거센 파도로 찾아왔다.그저 황망하게 그를 올려다보는 것 외에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 입을 꿰매기라도 한 듯 소리가 나오지 않는 입술을 뻐끔거렸다. 이제까지 그녀가 보고 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은 이제까지 어떤 생각을 하면서, 날 보고…… 있었던 거야?──속이 울렁거렸다. 눈앞의 남자가 낯설었다. 비행선을 탈 때 느끼던 어지러움, 귓바퀴를 타고 시끄러운 소리 같은 것이 들리면서..

심연의 서막 2017.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