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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 12.15. 태산이太山移

ㅡ리그 입성 로그 더보기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잎 나부끼는 소리가 들리는 늘봄의 어느 코트 위, 짐리더 대 챌린저의 위치를 넘어서 그저 한 사람의 트레이너로서 마주했다. “조언을 들려줘. 인생의 스승님!” “……하! 인생의 스승이라니, 낯간지런 소릴 다 듣겠군 그래!” 낯간지러운 말이라고 답하면서도 진달래는 썩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제게 지겹게 도전하고 깨지고, 종국에는 코트 위에 올라서서 무책임하게 기권이나 선언하던 녀석이 리그에 오르도록 성장하는 것에 그도 감회가 깊어진 것일까.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미 거기까지 도달했다면 네가 가장 잘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오로지 한 가지! 심플하게 생각하자고. ‘이왕 시작한 거, 최고가 되자!’” “그야말로 달래 씨다운 말이로구만. 그런 대답일..

061) 12.11. 자유自由

ㅡ이치이 귀하 더보기 새벽부터 늘봄에 다녀온 능란은 여전히 한자리에 웅크린 채 꼼짝 않는 이브이를 품에 안아 들었다. 녀석, 고집하고는. 밥은 먹은 거야? 이브이의 입에 포록을 물려주고 제 발로는 걷지 않는 포켓몬을 데리고 텐트를 옮겼다. 이치가 돌아올 때까지 잘 보이는 곳에서 기다리자. 속삭임에도 포켓몬은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능란의 품을 벗어나 도망치려는 것도 아니었다. 너도 역시 이치이의 포켓몬이구나. 도망가는 법이 없어. 기특하게 여기며 그 머리를 문지르곤 남의 텐트 앞에 쪼그린다. 해는 이미 저문 지 오래지만 도원림의 서산 너머는 여전히 오묘한 푸른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렇구만. 밤이라고 해서 다 캄캄한 빛이 아니긴 해. 인공의 불빛이 잘 닿지 않는 곳이니까, 여긴. 평소엔 보이지 않는 색까..

060) 12.11. 해解

ㅡ리드 귀하 더보기 “이 정돈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담담하게 향해오는 목소리에 서릿발 같은 날카로움은 없었다. 그래서 여자는 개구지게 웃었다. 그야 이해 못 할 것도 없지. 알았어, 리드 씨가 하고 싶은 말. 이렇게 서로 터놓고 이야기하면 처음부터 참 좋았을 텐데 참 많이 돌아오기도 했다 싶은 게 작금의 감상이다. 유난히, 눈앞의 이 상대와는 말이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첫 만남은 명함을 나눠주면서부터. 14살 어린 나이였지만 이미 자신의 명함을 가지고 있던 상대를 능란은 어린애로 대하지 않았다. 그야, 이미 화랑에는 그와 동갑의 체육관 관장도 있지 않던가. 단순히 나이만 갖고 어린애 취급을 할 것은 아니었단 말이다. 하물며 리드는 다 자라지 않은 마른 체구에 꼭 맞춘 정장을 한시도 벗지 않을 ..

059) 12.11. 숭산崇山

ㅡ여행의 발자취: 진달래 더보기 새벽이 밝자마자 눈이 떠졌다. 규칙적으로 자고 일어나는 습관이야 20년을 몸에서 떠나지 않는 법이었으나 오늘은 마음가짐부터가 유난히 달랐다. 전날 밤, 나나에게 부탁해 편지를 보내두었다. 수신인은 늘봄체육관 관장 진달래. ‘익일 찾아뵙겠습니다.’, 답장은 간결했다. ‘언제든 와라.’ 언제든 오라고 했으니 정말 언제든 갈 셈이었다. 그래서 잎사귀의 이슬이 마르기도 전에 나갈 채비를 했다. 다른 녀석들은 볼에 넣고 모모와 배배만 꺼냈다. 아직 졸린지 눈을 부비는 모모를 배배 위에 올린 채 능란은 공중날기 택시를 부르는 대신 도원림의 돌계단을 걸었다. 다각다각하게 배우르의 발굽이 돌계단을 밟는 소리만이 고요한 새벽의 도원림에 울렸다. 길을 벗어나는 순간 무시무시한 챔피언로드의 ..

058) 12.08. 극동의 도원향 : 나린체육관 도전

ㅡ나린체육관 챌린저 클래스 더보기 포근하고 아름다운 극동의 마을, 나린은 어디로 눈을 돌려도 분홍빛의 벚꽃다발 흔들리는 풍경이 마치 설화 속 도원향을 연상케 하는 곳이었다. 하필이면 옛날 신선들의 과일이라 불리던 복슝열매 과수원까지 유명하여 된바람 산맥과 바다로 인해 화랑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고립된 위치에 속하기까지 해 여러모로 신비주의에 휘감겨 있기도 했다. 나린 사람들은 마을 안에서도 맛있는 게 많아서 배달도 안 시켜 먹는다더라. 다른 마을의 이미지란 것이 대체로 만파식적을 이용하느냐 안 하느냐로 결정되는 능가에서는 이 한 줄의 감상이 전부이긴 했지만 말이다. “거기에 더해서 나는 복슝타르트가 맛있는 곳이라 좋아했는데.” 어때, 맛있지? 포켓몬들에게 씩 웃으며 타르트를 자른다. 산맥을 넘자마자 하랑이..

057) 12.04. 휴식休息

ㅡ12주차 리포트 더보기 많은 일이 있었다. 그 한마디로 축약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이 있었다. 그래놓고 끝나고 나자 다 좋은 일이었다고 가볍게 퉁, 넘겨버리고 마는 건 여자의 타고난 낙천성일 것이다. 여로를 데리고 지상으로, 빛 아래로 오르지 못한 건 조금 아쉬웠지만 일단 죽지 않았으니 됐다. 죽기라도 했다간 저희의 이야기를 훗날 아동용 애니메이션 같은 것으로도 제작하지 못할 뻔했다. 물론 아동용 애니메이션이라고 무조건 불살주의냐 하면 그것도 아니지만 그 담론은 차일로 미룬다. 우선은 부정적인 친구 앞에서 뻔뻔하게 희망을 입에 담았던 책임만큼의 결과를 끌어낸 것에 안도다. 덕분일까. 신기하게도 능란은 나린마을에 도착한 직후에도 고양감이 빠지지 않아 펄펄 뛰었다. 기진맥진해 숙소도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

056) 12.02. 설담 雪譚

ㅡ이치이 귀하 더보기 이른 아침, 대체로 사람이 적은 시간대에 자고 일어난 건지 또 안 잔 건지 눈밑의 시꺼먼 게 사라질 날이 없는 녀석을 본 능란은 그러니까, 하고 운을 뗐다. “이치, 계속 그러고 있다간 머리에 김이 날 것 같으니까 잠깐 리프레시라도 하고 오자는 거야.” “너는 도전 끝났다 이거냐?” “오우, 바로 그거란 말씀.” 어차피 여기서 콩둘기처럼 서성이나 하랑마을에서 그러나 다를 게 없잖아. 쓸데없이 움직일 거면 그 김에 의뢰도 해치우자는 거야. 그렇게 남자의 팔을 당기자 웬일인지 그가 순순히 따라왔다. 웬일? 그 표정 그대로 쳐다보자 덤덤하던 남자의 콧잔등에 주름이 잡힌다. “이미 준비할 건 다 했으니까. 그리고, 같이 가기로 했잖아.” “으핫, 그렇지. 약속했지. 약속을 잘 지키는 남자가..

055) 11.28. 만나자마자, 만난 뒤로

ㅡ샤샤 진화 더보기 땅거미 습지의 꼬시레가 습지를 벗어나 한 트레이너를 따르게 된지도 어느덧 한달이 넘었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지난 세월 동안 습지에서 겪은 자극의 총량을 뛰어넘을 사건사고에 휘말렸다. 무시무시한 포켓몬, 험한 배틀에 치이며 트레이너를 원망하며 울분을 삼키고 이럴 거면 왜 나를 데려온 거냐고 속앓이도 했다. 오아시스의 푸르고 맑은 물을 헤엄치거나 음악과 춤이 가득한 마을에서 알록달록한 천의 빛깔을 등에 업으며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태어나 처음 보는 눈 가득한 세상에서 자신의 발자국을 남겨보거나 마음을 울리는 음률에 귀 기울이며 화톳불을 쬐면서 이대로 안온하게 지내는 삶을 꿈꿨다. 악마쥐에게 걸려 더듬이 한쪽이 꺾이는 불상사도 있었지만 욕심 없는 꼬시레, 샤샤는 더듬이 하나를 내..

054) 11.28. 고산孤山

ㅡ우금마을 아르바이트 + 우금체육관 챌린저 클래스 더보기 마루길 우금마을 고산탑, 입구에 무어라 한자가 적혀 있던 것 같지만 높이를 가늠하는 일에 집중해서 뜻은 보지 못했다. 높을 고에 뫼 산을 써서 그저 높은 산의 탑이라고 한다면 조금 실망일 것도 같았다. 좀 더 폼 나는 이름으로 붙여줘야지! 그렇다고 해서 고독한 산이란 이름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우금마을의 상징처럼 존재하는 탑은 그 존재 의의부터가 수많은 무예가들의 수련을 위한 곳으로, 포켓몬 트레이너마저 포함해 자기 연마를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시험하고 한계에 도전한다고 했다. 그야말로 화랑 정신이 응집된 곳이다. 이제껏 드물게 배달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입구에서 도시락을 넘겨주고 돌아왔던 능란은 이곳을 직접 오를 때가 되자 감회가 새로워 벅차..

053) 11.27. 가담항설의 꿈 道聽塗說之夢

ㅡ11주차 리포트 더보기 피부가 에일 것만 같은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에 망토에 달린 털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여자는 커다랗게 자란 음번과 함께 협곡을 활공 중이었다. 삐죽삐죽하게 오른 산맥은 완만한 능선을 그리는 다님길과 몹시 다른 분위기를 뽐내었는데 북쪽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좌로 꺾이면 눈발을 흩뿌리고 우로 꺾이면 오직 차갑기만 한 건조함을 자랑한다는 점이 신기하기도 했다. “위위, 네 순풍은 어느 방향을 타고 갈래?” 음번이 가고 싶은 그대로 자유롭게 날아가도록 하며 여자는 낯선 하늘의 풍경을 감상하였다. 희박한 공기를 폐가 터질 때까지 깊이 들이마시고 아주 천천히 뱉어낸다. 그동안 허공에 흩뿌려지는 뿌연 입김을 헤치고 내려다보는 지상은 꼭 손바닥 위의 이야기책 같았다. 이럴 때 보면 한없이 작은 ..